빛으로 덖은 녹차밭 ‘色에도 香이 있네’

입력 2013-12-26 02:48 수정 2013-12-26 03:23


한겨울 보성으로 떠나는 맛과 향의 힐링여행

얼어붙은 심신을 녹여줄 한겨울 여행지로 전남 보성만한 곳도 없다. ‘정글만리’로 요즘 히트를 치고 있는 작가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인 보성은 꼬막과 녹차로 유명한 맛과 향의 고장이다. 문향 그윽한 벌교 골목길에서 소설 속의 공간을 배회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진다. 보성차밭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봇재에서는 ‘보성차밭 빛축제’가 펼쳐진다. 차밭에 설치된 작은 꼬마전구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예술에 빠져들면 추위쯤은 아랑곳 않게 된다. 이른 아침 뜨끈뜨끈한 해수녹차탕에서 득량만 해돋이를 감상하는 호사도 한겨울 보성 여행에서 맛보는 특별한 힐링이다.

보성 겨울여행은 보성차밭에서 시작된다. 보성차밭은 지난 9월 미국의 CNN이 발표한 ‘세계의 놀라운 풍경 31선(31 beautiful sights on this incredible planet)’ 중 12번째로 소개된 국제적 명소. CNN은 잠비아 빅토리아 폭포,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과 함께 보성차밭을 소개하면서 매년 5월에 열리는 보성다향제 녹차대축제와 12월에 개최되는 보성차밭 빛축제를 다뤘다. 이 때 찾아가는 교통편까지 언급했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겨울의 보성차밭은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새봄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한겨울에도 초록의 꿈을 잃지 않는 차밭 풍경도 경이롭지만 유려한 곡선의 등고선을 그리는 차밭의 설경은 자연과 인간이 합작해서 만든 거대한 설치작품이라 더욱 감동적이다.

보성차밭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차나무 행렬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하학적인 곡선을 그리는 봇재 고개. 박유전 정응민 등 서편제 소리꾼들이 넘던 고개라고 해서 소리고개로도 불리는 봇재는 차밭의 풍경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유일한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날에 봇재의 다향각에서 만나는 녹차밭 설경은 달력사진처럼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봇재에 어둠이 깔리면 밤하늘의 별이 모두 내려앉은 듯 보성차밭에 설치된 120만개의 꼬마전구가 오색찬란한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빨강, 분홍, 노랑, 파랑, 초록, 하얀색 불빛이 차밭 이랑을 따라 교대로 점멸하는 모습은 수만 관중이 파도타기 응원을 하듯 역동적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보성차밭 산책로에는 사각형과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빛의 터널, 하트 모양의 은하수 터널 등이 연인들을 유혹한다. 특히 은하수 터널은 블랙홀처럼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불을 밝힌 꼬마전구들이 은하수처럼 환상적이다. 전구가 명멸하는 터널을 연인과 함께 산책을 즐기다보면 우주를 걷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보성 겨울여행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 든 벌교포구를 중심으로 현부자네 집을 비롯해 회정리교회, 김범우의 집, 철다리, 소화다리, 벌교역, 홍교, 자애병원 등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건축물과 엠원고지, 진트재, 중도방죽, 제석산 등 소설의 배경이 된 공간이 공존하는 벌교에서 완성된다.

제석산 자락에 둥지를 튼 ‘태백산맥 문학관’은 벌교 여행의 출발점.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육필원고 1만6500장이 어른 키 높이로 전시되어 있는 문학관에는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로 끝나는, 누렇게 퇴색한 육필원고의 끝장이 눈길을 끈다. 건물 밖에는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고 통일을 간구하는 거대한 옹석벽화가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맨살로 막아서고 있다.

‘태백산맥’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현부자네 집은 문학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과 안채가 한옥이지만 일본식 건축기법이 가미된 건물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 소설에서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고 묘사한 현부자네 집은 양지바른 곳에서 중도 들녘과 벌교 시가지를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다.

소설에서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으로 묘사한 소화의 집은 문학관과 현부자네 집 사이에서 대숲에 둘러싸여 있다.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무당 월녀의 딸 소화는 이 집의 신당에서 애틋한 사랑을 시작했다. 1988년 태풍에 집이 쓰러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을 2008년 보성군에서 복원했다.

“워메, 내 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 겉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라운 니는 천상 타고난 여잔디. 금메, 그 인물 그 솜씨 아까워 워쩔끄나와.”

‘태백산맥’에서 무당 월녀가 무남독녀 소화의 감칠맛 나는 꼬막무침 솜씨를 칭찬하면서도 무당의 딸로 태어난 서글픈 현실을 한탄하는 대목이다. 찬바람이 부는 11월부터 3월까지 벌교 앞바다 갯벌에서 채취된 꼬막은 미네랄이 풍부하고 쫄깃쫄깃 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그래서 요즘의 벌교는 꼬막을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운집한 미식가들로 음식점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묶던 남도여관으로 묘사된 보성여관은 꼬막 음식점들이 즐비한 벌교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1935년에 건축된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은 근현대사의 기억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지난해 복원공사를 거쳐 일반에 공개됐다. 카페로 꾸며진 1층에는 문학기행을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긴 복도와 다다미방으로 이루어진 2층 객실은 유리창으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보성=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