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평양發 한겨울 공포특급

입력 2013-12-25 01:45


장성택 처형은 ‘평양발 깜짝 뉴스’에 익숙한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에게도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처형 소식이 ‘긴급’으로 보도된 지 2시간여 지난 12일 밤(현지시간). 워싱턴DC의 한반도 문제에 관심 있는 미국인과 한인들의 모임인 ‘워싱턴클럽’의 송년회는 장성택 처형 관련 토론회로 성격이 바뀐 듯했다.

심각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사건을 놓고 얘기를 나눴다. 이날 모임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백악관 당국자가 “예측 불가능이 표준인 북한 정권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라며 짐짓 ‘북한은 원래 그런 곳’이라는 식으로 얘기하긴 했다. 하지만 북한 관측통들의 속내는 저명한 북한 경제 전문가인 피터슨연구소의 마커스 놀런드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형 집행 뉴스는 너무나 충격적인 반전이다. 북한 문제를 20년간 연구했지만 고위급 지도자를 이렇게 극적으로 체포해 즉각 사형을 집행한 것을 들어본 바 없다”고 했다.

이후 이 사건을 둘러싼 현기증 날 만큼 다양한, 때로는 상충되는 관측과 해석이 이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식견이 깊지 않지만 워싱턴의 여러 관측통들의 의견을 직간접적으로 들어보면서 몇 가지 ‘감’이 잡히는 게 있다.

첫째는 장성택 숙청에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정적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은 신빙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중심으로 김씨 가문이 이번 사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체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미 해군분석센터 켄 고스 해외연구국장의 의견인데, 그는 이번 숙청의 장본인은 김 제1비서이며 심지어 장성택의 부인 김경희가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장성택의 숙청을 독려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한다.

이처럼 ‘가문의 우환(憂患)’이 될 싹을 잘랐으니 김 제1비서의 권력이 공고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법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러한 ‘판단 유보’의 핵심에는 이번 사건으로 확연히 드러난 김 제1비서의 성격(character)이 있다. 그동안 김 제1비서의 성격이 ‘충동적’ ‘즉흥적’이라는 추정이 많았는데, 이번 장성택 숙청 과정에서 그것이 입증됐다. 왕조에 가까운 북한과 같은 폐쇄적 독재체제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 독재자의 권력이 오랫동안 유지될 공산은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북한인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는 유교 전통도 주요 잣대가 될 수 있다. 김 제1비서가 아무리 성토하더라도 장성택은 김씨 가문의 일원이다. 혈통은 아니지만 김 제1비서의 고모부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우상화된 김일성 주석의 사위다. 장성택이 역적이라면 그를 사위로 간택한 김 주석의 판단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김 주석의 다른 정책적 판단도 오류일 수 있다는 자가당착이 발생한다. 어떻든 40년간 북한 정권에 공헌한 원로를 속전속결로 잔인하게 처형한 데 대한 충격과 함께 “피붙이를 이렇게까지…” 하는 정서적 앙금이 북한인들에게 오래 남을 것이다.

게다가 김 제1비서가 장성택 처형 직후 전 미 프로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을 끌어들여 ‘스포츠 쇼’를 벌이는 것을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볼까.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너선 폴락 중국센터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 주석 사망 후 3년상을 치렀다. 김 제1비서가 3주일상이라도 치렀나”라고 반문했다. 김 제1비서가 한국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유교적 정서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