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사회적 부검
입력 2013-12-25 01:32
오래전에 인기를 끌었던 범죄 수사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부검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1971년 3월 초순부터 89년 10월 중순까지 방영된 ‘수사반장’을 모두 본 것이 아니어서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뇌리에 부검 장면이 남아 있지는 않다. 요즘 방영되는 미국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는 부검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수사 기법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이때 부검(剖檢)은 사인(死因) 따위를 밝히기 위해 사후(死後) 검진을 하는 것으로, 신체적 부검을 뜻한다. 반면 심리적 부검은 자살한 사람의 물리적 사인이 아니라 심리적 요인을 규명하는 것을 말한다. 전문가가 자살자의 가족 친구 동료 의료진을 만나 심층 면접을 하고, 고인의 개인적인 기록과 병원의 의무기록 등을 수집해 자살 원인을 찾아낸다.
자살률 세계 1·2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던 핀란드는 86년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자살 방지 프로젝트의 하나로 심리적 부검을 도입했다. 이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인구 10만명당 30.3명이던 자살률이 지난해 17.3명으로 낮아졌다. 심리적 부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실효성 있는 자살 예방 대책을 마련하게 된 덕분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심리적 부검을 실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시가 지난 1월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자살 예방을 위한 심리적 부검을 도입했다. 부검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적절한 용어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판사 박형남)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판에 심리적 부검을 도입해 세무공무원 김모씨의 자살 원인을 밝혀내고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업무 과다가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1심 재판부의 판결을 2심 재판부가 뒤집은 것이다.
김씨의 유족 4명과 직장 동료 3명을 면담한 감정인이 “김씨가 개인적·경제적 이유 없이 순수하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진술했고, 2심 재판부가 검증절차를 거쳐 감정인의 진술을 받아들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념·세대·계층·지역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갈등을 제때 해결하지 않으면 국가 발전에 큰 장해물이 될 수 있다. 갈등이 폭발하면 국가와 사회가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 원인을 규명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부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