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1) “하나님, 임만호가 훌륭한 사람되게 복많이 주세요”
입력 2013-12-25 01:42
나는 1940년 10월 10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가덕에서 태어났다. 두 달 뒤 아버님이 일본군 비행장 문관으로 근무하시던 중국 헤이룽장성 너흐라는 곳으로 어머님과 같이 떠났다. 1945년 3월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함평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신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이 터졌다. 학교 대신 집에서 아버님에게 천자문을 배웠으며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에서 보냈다.
나는 5살 때부터 누님과 함께 할머니와 친척들이 다니던 가덕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새벽종 소리와 함께 양회덕 장로님이 새벽기도를 가시면서 우리 집 앞을 지나실 때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일어나 그 장로님을 따라 교회에 가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주일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금주 생일축하 시간에 나를 80여명 되는 학생들과 선생님 앞에 세우시고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시며 “감사하신 하나님 임만호 위에 복과 은혜 비와 같이 내려 주시고 간 데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사 영원토록 즐거웁게 하시옵소서 아멘”이라는 노랫말의 축가를 불러주셨다.
지금도 이 노래를 기억하고 가끔 부른다. 부장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임만호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니 복 많이 주세요”라고 기도해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 이 일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교회에서 돌아와 아버님께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물었더니 아버님은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며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하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시며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교회에서는 요셉, 아브라함 이야기도 들었다. 그날 이후 74세인 지금까지도 항상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생각도 훌륭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눈을 뜬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밤, 내가 다니던 신광초등학교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기에 저녁을 빨리 먹고 어른들을 따라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200여명의 면민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구령대 앞에 장대를 세우고 하얀 천을 매달아 발전기를 돌려 흑백 활동사진이 돌아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제목은 ‘윤봉길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백천대장에게 ‘벤또폭탄’을 던져 죽게 하는 약 1시간짜리 영화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버님께서 광복절 행사 때면 일본의 만행에 대해 들려주시던 것을 떠올리며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점령한다면 내가 윤봉길 의사처럼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내가 윤봉길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인데 왜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시 침략하지 않느냐’면서 기다리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교회는 전쟁 속에서도 예배를 드렸고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주일학교는 쉬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일이면 인민군 아저씨 한 사람이 딱궁총을 메고 예배를 드리러 우리 교회에 왔다. 그 아저씨는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노래도 가르쳐주다가 총을 메고 내무서(지금의 지서)로 뛰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아마도 북한의 독실한 기독청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임만호 장로 약력=1940년 전남 함평 출생, 숭실대 경영학과 졸업,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 1975년 도서출판 크리스챤서적 설립, 1997년 월간 창조문예 창간, 1998년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 회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