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곳곳서 줄 서는 일본인들… 순응·체념의 표시인가
입력 2013-12-25 02:33
지금 일본사회 곳곳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특유의 국민성이 반영된 듯 정연해 보이지만, 줄이 향하는 방향은 불분명하다. 늘어선 행렬은 파편화돼 있거나 극단으로 흐를 듯한 불안감을 준다.
방사능 공포 속에서도 수산물 가게와 생선요리점에 다시 등장한 줄은 체념에 가까운 현실의식을 반영한다. 정권이 온갖 구호를 쏟아내지만 변화의 기운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장기불황의 관성과 잠재된 재해의 공포 속에서 불안을 애써 외면하거나 무관심이 만성화된 모습이다. 일본 최대 수산시장인 도쿄 쓰키치(築地) 시장에서 20년 동안 생선 도매상을 해 온 데루야 다이키치(照屋大吉·55)씨는 “올 봄부터 그나마 사람들의 발길이 늘었다”면서 “원전 사고 이후 수산시장은 지독한 불경기였다”고 되뇌었다. 올해 들어 원양산 생선의 비중을 늘렸다는 그는 “일본을 떠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도시 생활인들은 수시로 복권을 산다. 퇴근 시간대 복잡한 도심에 늘어선 줄은 십중팔구 ‘명당’으로 소문난 복권판매소로 이어진다. 오랜 기다림 끝에 복권을 손에 쥔 한 중년여성은 “당첨되면 세계일주를 하고 가장 마음에 든 나라에 정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복권 손님을 안내하던 간노 나미에(菅野奈美惠·26·여)씨는 “어렵게 구한 초저녁 아르바이트”라며 “자정부턴 편의점에서 3교대 근무를 한다”고 밝혔다. 구직을 거의 포기했다고 밝힌 그는 청년실업 대책에 대해 “정부에 거는 기대가 별로 없다”고 답했다.
사람들의 행렬 한편에는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다. 택시기사 마쓰모토 유이치(松本雄一·58)씨는 “그래도 연말에 고급 술집을 찾는 이들이 다시 생긴 것을 보면 돈이 풀린 데가 있긴 한 모양”이라며 자조적인 속내를 내비쳤다.
일왕의 거처인 고쿄(皇居)로 이어지는 사쿠라다몬 앞에서 마주친 이들의 일사불란한 발걸음은 우려스러웠다.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한 무리의 남성들이 줄지어 길을 건너는 모습은 낯설고 특이했다. 요코하마 소재 중고차 매매회사 직원들이 단합대회에 나선 길이었다. 고쿄로 들어가는 메가네바시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단체사진을 찍은 이들은 곧바로 야스쿠니(靖國) 신사로 향했다. 일렬종대의 대형은 신사 앞마당에서 사열횡대로 펼쳐졌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이들은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과거사 논란의 중심인 공간이 이들에겐 그저 결의를 다지거나 복을 비는 유서 깊은 장소일 뿐이었다.
정치권력이 체념에 가까운 상실감에 빠진 일본 국민들의 힘을 모았을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무작정 앞 사람을 따라 어디로 향할지 모를 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과 손을 잡고 대열의 방향을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도쿄=사진·글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