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女행장 탄생… ‘은행 유리천장’ 마침내 깨졌다

입력 2013-12-24 03:28


국내 첫 여성 은행장 탄생- 권선주 IBK 은행장 스토리

어떤 곳보다 ‘유리천장’이 두꺼운 시중은행에 처음으로 여성 행장이 탄생한다. 주인공은 권선주(57) IBK기업은행 현 부행장(리스크관리본부장)이다. 금융위원회는 23일 차기 기업은행장에 권 부행장을 임명 제청했다고 밝혔다.

권 부행장은 은행권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은행권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 문화를 극복하고 가는 곳마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냈다. ‘여성 공채 1기’ ‘최초 1급 승진’ ‘최초 여성 부행장’이 그에게 달린 칭호다.

경기여고와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기업은행에 처음 발을 디딘 1978년은 여성이 행장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은행 업무는 철저히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 중요한 일들을 여성인 권 부행장에게 맡기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오기가 생겼다. 은행 일로도 벅찬 새내기 시절부터 금융연수원의 은행업무 교육을 차근차근 밟았다. 공부는 휴일에도 이어졌다. 그는 금융연수원의 모든 은행교육을 마친 후에 지점장을 찾아가 “여신업무를 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결국 남성의 전유물이던 여신업무를 여성 최초로 맡았다. 출산도 그의 일 욕심을 막지는 못했다. 첫 아이를 낳을 때엔 한 달 만에 복직을 해야 했다. 둘째 아이는 출산 하루 전까지 근무했었다.

권 부행장은 이날 임명 제청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기자들과 만나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여성에게 주는 업무가 제한적이었다”며 “주부이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통신연수(집으로 배달된 책으로 독학)로 모든 과정을 거치며 배웠다”고 회상했다.

서울 광장동 워커힐 지점에서 일하던 차장시절에는 칼을 든 남성을 상대할 정도로 두둑한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1992년 영업이 끝난 은행에 한 남성이 칼을 꺼내들고 “도와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그를 협박했다. 자신이 경영하던 중소기업이 부도 위기에 내몰리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권 부행장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일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어요?”라며 상대를 설득해 내보냈다.

배짱이 두둑한 일벌레라는 평을 듣지만 가정에서는 현모양처다.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성의 아내로 살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침밥을 챙겨주곤 했다. 매일 새벽 5시 이전에 일어나 가족들이 아침을 먹는 모습을 봐야 하루가 든든했다. 이를 위해 되도록 일찍 자려고 애썼다. 하지만 직급이 높아질수록 저녁 회식 자리는 늘어만 갔다. 묘수를 짜낸 것이 술잔을 최소화하는 일이였다.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늘 1차에서 마무리했다.

권 부행장은 가정과 직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비결을 시간에서 찾았다. 그는 단 1분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었다. 권 부행장은 “집에 있을 때나 직장에 있을 때 우선순위를 정해서 일을 하고 있다”며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집에서 요리할 때도 책이나 리포트를 서서 읽는다. 가족들과 시간이 부족하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줄넘기를 하면서 얘기도 하고 운동도 한다”고 했다.

힘겹게 쌓은 실력은 대내외 모든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기업은행 내에서 리스크관리본부장, 금융소비자보호센터장, 카드사업본부장, 중부지역본부장 등 요직을 두루 경험했다. 남성 못지 않은 전문성으로 2011년 기업은행에서 50년 만에 최초로 여성 부행장자리에 올랐다. 시중은행 최초의 은행장 내정은 그의 행적과 역량에 비춰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금융위 관계자는 “현재 금융 환경은 중소기업금융과 리스크관리 이 두 가지가 가장 강조된다”며 “이를 위해 기업은행에서 성장한 사람, 리스크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임명의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권 부행장도 조준희 현 행장이 다져 온 대부분의 전략을 기반으로 중소기업 지원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창조금융과 관련해 문화콘텐츠나 IP(지적재산권)지식산업에 대한 평가를 활성화할 것”이라며 “고객컨설팅, 문화마케팅 등도 다 이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또 “모든 은행은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기관”이라며 “들고 있는 자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을 고민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기업은행에 여성만이 가진 DNA도 전파한다는 계획이다. 권 부행장은 “지금은 여성성이 강조되는 사회”라며 “예전은 IQ(지능지수)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EQ(감성지수)나 CQ(카리스마 지수)의 사회인데 이 부분은 여성들이 잘할 수 있고, 은행업은 서비스업이니 충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삼열 박은애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