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목 교수가 말하는 우리가 몰랐던 고문서… “조선왕조실록은 한번 걸러진 자료”

입력 2013-12-24 02:34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고문서 연구를 통해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기관의 사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풍토가 강한 한국에서는 그동안 고문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 한국고문서학회가 펴낸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역사비평사),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가 쓴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휴머니스트) 등의 결과물이 대중 앞에 나온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전 교수를 23일 경기도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나 우리가 몰랐던 ‘고문서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는 것이 물론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은 지배층이 원자료들을 토대로 이미 걸러낸 자료라는 한계가 있다”며 “제도권 밖 평민들의 생생한 삶을 들려주는 고문서를 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를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여성들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싶지만 전 교수는 “가능했다”고 말한다. 전북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최덕현’이란 사람이 ‘을유년 12월 20일’에 쓴 고문서를 보자. 한문으로 된 내용을 풀어보면 최덕현은 “나의 아내가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중략) 앞길이 있기에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 영원히 혼인관계를 파하고 위 댁으로 보낸다”고 적고 있다. 전 교수는 이 문서가 “(을유년인) 1825년 또는 1885년에 최덕현이 이혼 합의금 조의 위자료 35냥을 받고 아내와 혼인관계를 청산한 뒤 중인이나 양반 댁에 들여보내며 쓴 문서”라며 “이를 보면 사대부나 양반 출신 여성과 달리 평민이나 천민 여성은 이혼이나 재혼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문서를 통해 우리가 모르고 있던 조선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고문서 관리나 연구는 미미한 상황이다. 전 교수는 “고문서의 글자는 흘려 쓴 초서도 알아야 하고, 이두가 많이 등장해서 이두도 알아야 한다”며 “역사적인 배경 지식도 있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해독부터 쉽지 않다보니 이런 자료들을 통해 그 시대를 재조명하고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내놓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100만점 정도의 고문서가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돼 있지만 이 중 제대로 연구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도 고문서는 청자나 불상 등 다른 유물 등에 비해 홀대받기 일쑤다. 해외에서는 고문헌 연구가 기초학문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문헌관리학과가 유일하다. 그는 “고문서를 통한 연구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며 “좀 더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이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