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자 심리 되짚어 산재 인정한 법원
입력 2013-12-23 01:32
세무공무원 A씨는 43세가 된 2008년 지방국세청 계장으로 전보됐다. 다음해 9월 조직이 개편되자 새 업무도 떠안았다. 오전 7시30분쯤 출근해 오후 8시쯤 퇴근했고 월평균 70여 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불면증에 시달려 말수가 줄었고 집에서는 거의 누워 지냈다. A씨는 2009년 11월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죽음을 택한다는 유서도 남겼다.
A씨의 죽음에 담겨 있는 단편적 사실들은 이렇다. 이것만으로는 A씨의 자살이 업무상 재해가 되긴 어렵다. 스트레스가 죽을 만큼 심했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없어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은 것은 주변 인물들이다. 각종 기록과 더불어 가족·동료 심층면접을 통해 자살의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을 ‘심리적 부검’이라고 한다.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판사 박형남)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판에 심리적 부검을 도입해 A씨의 자살 원인을 밝혀내고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22일 밝혔다.
A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는 시작부터 어려웠다. A씨 부인은 공무원연금공단에 보상금을 청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스트레스에 민감한 A씨의 성격 탓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행정소송에서도 입증은 쉽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경찰의 변사사건 조사 서류와 국세청 내부 자료를 기초로 정신과 전문의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그러나 기록만으로는 A씨가 어떤 업무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알기 어려웠다. A씨는 정신질환 진료를 받지 않아 변변한 의료 기록도 없었다. 1심은 “업무 스트레스가 자살할 만큼 과중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기록에 의존한 감정만으로는 진실을 알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1000건 이상 자살 사례를 연구한 전문의를 감정인으로 새로 지정했다. 감정인은 A씨 부인과 자녀, 직장 선후배 3명을 총 10시간 이상 심층면담을 했다. A씨가 2009년 11월 특별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A씨는 부인에게 “동료들의 다면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고교 후배인 직원들은 다면평가에서 제외됐다는 불평도 자주했다. A씨의 후배는 “A씨가 일선 세무서로 가고 싶어 했는데 ‘그러면 승진에 지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낙담했다”고도 말했다.
감정인은 A씨가 승진을 위해 과다한 업무를 참았는데 승진을 못하자 큰 좌절감을 느꼈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같은 감정 결과를 받아들여 “공단은 A씨의 유족에게 보상금 지급을 거부한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