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역사 치유의 현장 (4)]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피스메이커들 (상)
입력 2013-12-23 01:29
괴물처럼 버티고 선 장벽 넘어 평화·공존 목소리 오간다
“당연하죠. 난 그 사람을 용서했어요.”
사머 코칼리(44·사진)씨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인생을 팔레스타인 땅 안에 가둬버린 이스라엘의 공무원을 용서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 11일 코칼리씨의 고향인 팔레스타인 땅 베들레헴에서 코칼리씨를 만났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와 이곳의 현실을 목격하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주길 원하는 ‘대안여행그룹(ATG)’에서 일하고 있다.
코칼리씨가 아직 10대였던 1987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제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가 벌어졌다. 그의 친구와 사촌들도 다치거나 사망했다. 코칼리씨도 이스라엘 군인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땐 다들 그랬다.
코칼리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다칠까봐 걱정됐다. 없는 살림에도 돈을 모아 그리스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마련했다. 89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는 아테네로 갔다.
그리스에서 코칼리씨는 행복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에서 온 자신을 신기하게 여겼다. “내 고향 얘기에 다들 귀를 기울였죠. 마치 내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았어요.” 그 시절을 회상하는 코칼리씨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하는 고된 생활이었지만 약혼자를 만나 장래까지 약속했다.
92년,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코칼리씨는 고향에 돌아왔다. 딱 5일만 있다가 아테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코칼리씨의 출국을 금지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아테네에 두고 온 책도 친구도 약혼녀도 모두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 관리는 나에게 그리스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적어내면 아테네로 보내줄 수 있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고 했지요. 그걸로 내 인생은 여기 팔레스타인에 갇혀 버렸어요.”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인 1000여명이 사망한 뒤에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코칼리씨의 ‘조국’ 팔레스타인은 오슬로협정(1993년)이 체결되고 임시자치권을 확보한 뒤에야 독자적인 여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99년 연말, 그는 어렵사리 다시 그리스를 방문했다. 코칼리씨는 아테네 거리에 주저앉아 잃어버린 젊음, 빼앗긴 운명을 생각하며 통곡했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과 부둥켜안고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기독교인인 코칼리씨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단죄해선 안 된다. 다시는 나와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이 잘못됐던 것이지 그 자리에서 내 운명을 결정했던 그 사람을 미워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코칼리씨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와 공존을 염원한다. 4명의 딸을 둔 코칼리씨는 “내가 어렸을 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장벽도 없었고, 유대인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며 “내 아이들에게는 이스라엘인 친구가 없다. 그 점이 제일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이해하게 되고, 더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될 수 있고, 정말 친한 친구가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며 “하지만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청년들은 서로를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군인’이나 ‘테러리스트’로만 기억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팔레스타인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일을 하는 그의 꿈은 사람과 사람이 자유롭게 만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는 20세기 세계사의 갈등이 압축돼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혹독한 학살을 겪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이집트와 요르단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들을 몰아내려 했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아랍은 물론 유럽이나 미국, 유엔까지도 사실상 손을 뗐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한 채 그나마 확보했던 영토마저 상당 부분 빼앗긴 채 남겨졌다.
한국이 2005년 팔레스타인의 임시수도 라말라에 대표사무소를 설치했고 지난해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참관 국가’로 인정하는 등 국제적인 지위는 일부 향상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차별이 여전하다. 지난 18일에도 이스라엘 정부는 나블루스 인근의 팔레스타인 땅을 몰수해 정착민이 거주하도록 했다고 발표했다. 예루살렘은 물론 베들레헴 라말라 등 팔레스타인의 대도시 주변에는 높이가 최고 10m에 이르는 장벽이 지금도 세워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 깊숙이까지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들어와 불법으로 집을 짓는다. 정착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군대까지 곳곳에 주둔해 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들을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 베들레헴 장벽 앞에서 만난 야멘 엘라베드씨는 “매일매일 팔레스타인 땅이 줄어들고 있다”며 “이런 현실을 보고서도 가만히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느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청산하고 공존과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스라엘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다. 군에서 전역한 이들 중 팔레스타인인을 부당하게 차별한 경험을 고백하는 이들이 모인 ‘브레이킹 더 사일런스(Breaking the silence·침묵깨기)’는 팔레스타인 도시 헤브론에서 성지순례객들에게 이곳의 현실을 전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02년 팔레스타인 난민촌 제닌에서 난민을 축출하는 작전에 투입됐던 한 전역 군인은 “당시 평범한 난민들의 집에까지 군인들이 들어가 몹쓸 짓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134년 만의 폭설이 내린 지난 13일, 텔아비브에서는 이스라엘 최대의 평화운동 단체인 ‘피스 나우’의 연차총회가 열렸다. 철도 운행이 중단되고 도로가 막힌 상황에서도 700여명이 모여들었다.
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아이작 헤르초그 노동당 당수는 이날 기조연설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가 확산되면서 더 힘을 얻고 있다”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2개의 국가로 각기 공존하는 방안이 즉시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들은 “피스 나우의 총회 열기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바라는 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피스나우는 총회에서 새로 제작한 동영상을 공개했다. 평화 운동이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영상 중 다윗의 별이 그려진 흰 바탕의 이스라엘 국기와, 초록과 흑백 줄이 그려진 팔레스타인 국기가 함께 내걸린 장면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종차별과 공포가 거리에서 사라지도록, 평화가 경제를 이끌고 이 땅의 선한 소식이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평화 운동을 합니다. 아랍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시민이 집을 가지고,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없고, 세계에서 고립되지도 않고,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 평화를 만드는 것은 인기도 없고 때론 두렵기까지 한 일이지만, 이것이 미래를 위한 싸움임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베들레헴=글·사진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