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문화재 결벽증이 병이다
입력 2013-12-23 01:28
그날은 화창했다. 새 대통령은 새 문화재청장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했다. 노랑저고리와 남색치마 차림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5년여의 공사를 끝내고 새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도 보기에 좋았다. 전에 비해 자연미가 두드러졌다. 대통령은 ‘국보 1호를 되찾게 돼 기쁘게 생각합니다. 국민과 함께 문화융성의 새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국민들도 국경일을 맞은 양 기뻐했다. 지난 5월 4일의 일이다.
5개월 지나 문제가 불거졌다. 서까래의 단청이 벗겨진 게 발견됐다. 단청은 안료가 아교와 궁합을 이뤄 나무에 착 달라붙어야 하는데 박락(剝落) 현상이 생긴 것이다. 여론은 부실공사로 몰았다. 단청이 이 정도니 다른 분야는 안전할까, 숭례문이 이 정도이니 다른 문화재는 어떨까, 걱정이 꼬리를 물어 문화재 전수조사를 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문화재청은 초상집이다. 임명 과정부터 엉뚱해 보이던 청장은 수습을 잘 못했다는 더 엉뚱한 이유로 옷을 벗었다. 감사원은 50여명의 요원을 보내 이 잡듯 장부를 뒤지는 중이고, 경찰도 부실의 흔적을 매섭게 수사하고 있다. 2월말쯤이면 다들 놀라운 결과를 내놓겠지. 시스템과 프로세스, 하도급 과정의 문제 따위를 까발리고, 새 정책으로 마무리 지을 것이다.
단청박락이 원전비리와 동급?
그런다고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까. 언론이 적발하고, 국민이 화를 내고, 감사기관이 족치고, 경찰이 잡아들인다고 떨어질 단청이 붙어 있지는 않는다. 나는 이즈음 문화재를 보는 태도가 좀 솔직해져야 한다고 본다. 문화재란 게 과거의 유산이다 보니 정책도 시간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재 보존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화려한 스트라이커보다는 외로운 골키퍼의 숙명과 비슷하다.
숭례문 단청만 해도 그냥 보통 사찰에서 하듯 화학안료를 썼으면 위험부담도, 욕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국보 1호에 전통기법을 활용해 보자는 의욕으로 단절된 기술을 살리려 애를 썼는데 그만 탈이 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설거지하다가 접시 깬 사람을 원전비리와 동급으로 취급하려 들면 안 된다. 앞으로 한파가 닥치면 기와 몇 장이 깨질 수도 있고, 폭염에 노출되다 보면 나무기둥이 갈라질 수도 있다.
그때마다 호들갑을 떨 것인가. 숭례문 단청은 기술의 문제로 한정해야 한다. 이걸 확대해 석굴암의 안전문제까지 들추니 놀란 대통령이 경주로 달려가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어땠나. 대통령은 관계자로부터 “균열은 1910년 이전부터 있었고 현재 강도는 기준치보다 안전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걱정이 돼서 왔는데, 설명을 들으니까 보전에 어려움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며 합장한 뒤 돌아갔다.
시간의 무게만큼 너그러워지자
광화문 현판 사건도 반면교사다. 2010년 광복절에 맞춰 복원된 현판은 3개월 만에 금이 갔고, 여론은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당한 양 흥분했다.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이다 갑자기 한글 현판 문제로 번져 2년여 시간을 허비했다. 지금은 어떤가. 2011년 5월 깜쪽같이 틈을 메운 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다.
우리 국민에겐 문화재에 대한 순혈주의 혹은 결벽증이 있다. 숭례문 단청이 떨어진 것이 비리가 아니라 실력이 부족한 것인데도 전통의 계승 문제보다 단청장을 죄인처럼 대한다. 광화문 현판이 갈라지면 궁궐 목재의 수급을 걱정하기보다 희생양을 찾는다.
이제 좀 더 너그러워지자. 다정도 병이다. 문화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 실린 세월의 무게를 인정해야 한다. 옛 집을 고치는 복원 과정에서도 시간의 존재를 부정할 때 낭패가 생긴다. 궁궐 건축의 주춧돌에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것이 자연스러운가, 그걸 세척기로 하얗게 씻어내야 직성이 풀리는가.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