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동지(冬至)
입력 2013-12-21 01:28
어렸을 적 팥떡을 해먹을 때면 할머니는 팥을 일일이 걷어내고 남은 하얀 떡을 먹이곤 하셨다. 동짓날 팥죽을 쒀 먹을 때도 할머니는 자신의 팥죽 안에 동동 떠 있는 하얀 새알심을 내 그릇에 건네주셨다. 예부터 팥의 붉은색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건강을 지켜주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좋은 팥떡이나 팥죽을 쳐다보지도 않는 손녀가 안쓰러워 이런저런 말로 구슬리다 포기하신 할머니의 사랑법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팥죽과 함께 곁들여진 우리집 겨울철 별미는 사과를 박박 긁어서 밖에 내놔 얼린 천연 아이스크림이었다. 온 가족이 팥죽과 사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면 담뿍담뿍 내리는 눈을 뚫고 골목 멀리서 ‘찹쌀∼떡∼, 메밀∼묵∼.’ 하는 구성진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내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다. 24절기 중 하나인 동지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남회귀선과 황경 270도 위치에 있을 때로 북반구에선 지구가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날이다.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해서 ‘호랑이 장가가는 날’로 불리기도 한다.
동짓날 기나긴 밤은 마음 한쪽이 시리고 임이 더욱 그리워선지 외로움과 쓸쓸함의 소재로 인용되기도 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이 오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는 황진이의 시는 얼마나 절절한가. 밀양아리랑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고 구애한다.
동지는 새 날의 시작을 의미한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이 다시 찾아온다 해서 잔치를 벌이고 조상들께 차례를 지냈다. 고대 중국 주나라는 동지를 설로 삼았고, 우리나라도 고려시대 충선왕 이전까지 동지를 설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고 고문헌들은 기록하고 있다. 서양에서도 태양신을 숭배하던 페르시아 미트라교에서 동지를 ‘태양 탄생일’로 정해 축하했고 초기 기독교가 이를 이어받아 예수 탄생을 기념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춘정 변계량은 “동지에 집집마다 팥죽을 쑤었구나/ 양기가 어디서 생기는가 알고자 하니/ 매화의 남쪽 가지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린다”고 읊었다.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2013년의 기나긴 밤이 지나면 우리에게도 희망의 소식이 들리려나.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