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세대 작지만 울림 큰 기부

입력 2013-12-21 01:49


서울시립대 4학년 이형수씨, 취업전쟁 땀·눈물 밴 면접비 24만원 선뜻

‘하반기 공채 모집에 지원해주신 귀하의 열정은 뛰어나나 함께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 뵙길 바랍니다.’

서울시립대 4학년 이형수(26)씨는 지난 8월부터 진행된 하반기 기업 공채에서 이런 ‘불합격’ 통보 문자메시지를 76번 받았다. 문구도 다 외웠다고 했다. 휴대전화에서 ‘딩동’ 문자 수신음이 울리면 직감적으로 당락을 예감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예정된 발표 시각에 문자가 오면 불합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합격자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문자가 온다’ 같은 노하우도 생겼다.

그에게 면접 기회를 준 회사는 세 곳뿐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러 갈 때는 합격의 기대가 컸지만 최종 발표에선 다시 절망으로 바뀌곤 했다. 그의 손에 남은 건 면접 기회를 준 세 회사가 ‘면접 보러 오느라 고생했다’며 차비조로 쥐어준 면접비 24만원뿐이었다.

77번째 도전에 나섰던 지난달 21일 이씨는 면접을 보러 갔던 세 번째 회사에서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에게 ‘신입사원’ 타이틀을 허락한 곳은 우리은행이었다. 그 흔한 금융 관련 자격증 하나 없고 대학 전공도 금융과 거리가 먼 철학이지만 우리은행은 봉사활동으로 일관해온 그의 삶을 높게 평가했다. 이씨는 2011년부터 구호단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봉사단원으로 활동했다. 다른 취업준비생들이 토익 점수를 올리는 데 집착할 때, 그는 전국을 돌며 시골 마을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을 찍어드렸다. 방학 때면 전북 순창, 경남 합천 등지로 내려가 낡은 집을 찾아다니며 집수리를 거들었다.

그가 취업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면접비 24만원(○○카드사 1차 면접 3만원, 2차 7만원. △△유통회사 1차 1만원, 2차 1만원. 우리은행 1차 7만원, 2차 5만원)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하는 것이었다. 기대와 긴장 또는 절망과 좌절의 대가로 그의 주머니에 들어갔던 그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기쁨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 돈을 의미 있게 쓰자고 결심한 터였다.

이씨는 20일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고 살았는데 불합격 통보가 올 때마다 내 가치관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며 “합격하면 꼭 기부를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 왔다”고 말했다. 이씨의 기부금은 태풍 하이옌이 할퀴고 간 필리핀 타클로반 지역 재건에 쓰이게 된다. 그는 “24만원이 큰 돈은 아니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인생의 순간순간이 모여 만든 돈”이라며 “삶의 터전을 잃고 좌절해 있을 필리핀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