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그땐 그랬지… 60·30·20대 크리스천 ‘추억 여행’

입력 2013-12-21 02:28 수정 2013-12-21 14:22


▶추억여행 동행자

이의용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

: 1953년생

: 영락교회에서 직장인 예배 성가대 첫 기획 등 기독교 문화운동 선도

양지윤 (C채널방송 선교문화국 차장)

: 1974년생

: 1987년부터 명성교회 출석

한하원 (한양대 국제학부 2학년)

: 1993년생

: 모태신앙. 중고등학생부터 SFC(학생신앙운동) 활동 시작해 대학에서도 SFC 지속 중

1974년 엑스플로 성회,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수련회와 거지전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빨간 구역장가방, 성경퀴즈대회, 새벽송, 문학의 밤…. 한국교회 부흥의 시기를 대표하던 키워드들이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위기감이 이어지면서 이런 추억의 장면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추웠지만 따뜻했던, 배는 고팠지만 신앙 열정은 풍성하던 그 시절. 여기엔 요즘 ‘응답하라…’ TV 프로그램으로 촉발된 아날로그적 감성도 한몫하고 있다. 70년대 성장 시기를 거쳤든 거치지 않았든 요즘 신자들은 ‘응답하라, 한국교회!’를 외치고 싶다.

20년 나이차를 가진 3세대 그리스도인이 모여 ‘그때’와 ‘오늘’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의용(60) 국민대 교수, 양지윤(39) C채널방송 문화팀장, 한하원(20) 한양대학생은 최근 서울 부암동 CCC 내 역사기념관을 함께 둘러보며 “그땐 그랬지∼”라며 미소 지었다.

그때 한국교회는 ‘퍼주는 곳’

△이의용 교수=CCC 역사기념관에서 엑스플로 74대회 사진 봤죠? 당시 여의도는 한국의 성지였어요. 연인원 수백만명이 한꺼번에 모여서 기도한 장소는 여의도밖에 없었거든요. 다들 맨발로 무릎 끓고 기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집이 서울 면목동이었는데 버스로 마포까지 와서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까지 걸어왔어요. 73년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집회의 경우는 가수 조영남이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찬양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것이 전설이 됐지요. 73∼74년은 한국교회의 영적 기운이 절정을 이뤘던 시기였어요. 그때 한국 사회는 교회에 호의적이었는데…. 교회는 퍼주는 곳이었어요. 그때 교회는 그런 곳이었어요.

△한하원 학생=40년 전에 어떻게 그런 대형집회가 가능했을까요?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워요. 통신도 제대로 안 됐을 텐데, 어떻게 많은 사람이 모였을까요.

△양지윤 팀장=당시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20∼40대와는 다른 뭔가의 원동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졌습니다.

문화를 즐기려면 교회로 가라

△이 교수=양 팀장이 경험한 교회 문화는 뭔가요?

△양 팀장=저는 친구의 3년 기도 덕분으로 교회에 나갔어요. 하지만 제가 기도하는 것은 어렵더라고요. 교회가 재밌어진 것은 ‘문학의 밤’ 행사를 하면서예요. 90년대 당시 문학의 밤은 교회마다 열렸는데 웬만한 친구들은 교회에서 모두 만났어요. 누구나 교회에 왔고 거부감 없이 문화행사를 즐겼죠. 선배들은 열심히 준비했는데 한번은 예배당 천장을 뚫고 밤새도록 조명을 설치하다 손을 다치기도 했죠. 저는 새벽기도로 유명한 명성교회에 다녔는데 당시는 40일이나 한 달 동안 새벽기도를 했어요. 개근을 하면 메달을 줬어요. 아무것도 아닌 메달을 타려고 새벽마다 일어났죠(웃음).

△한 학생=저의 경우는 ‘달란트시장’이 생각나요. 달란트를 모아 오면 선물을 받았어요. 선물 받으려고 목숨 걸고 달란트를 모았죠. 교회 출석이나 전도활동, 성경퀴즈, 주보 모으기 등을 잘하면 달란트를 쌓았어요. 학용품을 많이 받았는데 지우개와 연필깎이, 스티커들이었죠.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 놀러가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양 팀장=당시 교회엔 세상에 없던 게 있었어요. 서로 위하는 마음과 따뜻함, 손대접, 배려입니다. 음악과 문학 등 예술은 덤이었고요. 그것들은 오직 교회에만 존재했죠. 친구들과 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미였는데, 아! OHP 필름도 교회에서 처음 봤어요.

△이 교수=그렇죠. 교회에 가야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시 교회 교육은 첨단을 걸었는데, 환등기를 알라나? 슬라이드는 학교에서는 아예 구경도 못했어요. 당시엔 학교에 풍금이 한 대밖에 없어서 음악 시간마다 이반 저반으로 옮겨서 사용했는데 교회에 오니 피아노가 있었죠. 말로만 듣던 피아노를 봤는데 와∼가히 문화 충격이었죠. 아무튼 사람이 되려면 교회를 다녀야 했어요. 하원 학생은 언제가 가장 신앙의 정점이었나요?

△한 학생=중3 시절요. 당시 시골교회를 다녔는데 2000명도 안 되는 마을의 유일한 교회였어요. 성탄절 준비를 석 달 동안 했어요. CCM, 워십댄스, 성극 등을 연습했고 서너 개 순서에 겹치기 출연을 했어요. 뭐, 작은 교회라 다들 그렇게 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 끝나고 교회로 몰려가 밥 먹고 저녁까지 놀았어요. 그러고 보면 교회는 집 같은 곳이었죠. 지금 교회는 시간을 정해놓고 가야 하는 곳이 됐어요. 저는 모태신앙이라 특별한 사건은 없었는데 중고등부 때 3박4일 동안 새벽 1∼2시까지 잠을 안 자고 기도하던 수련회는 잊을 수 없습니다.

△양 팀장=저는 대학 수련회가 생각납니다. 찬양과 기도 시간에 친구들이 울었는데 왜 우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한다”는 음성이 들렸고 저도 울고 있더군요. 그때 하나님 자녀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군대생활도 최고의 신앙을 유지했고요. 전방부대 앞에 교회가 있었는데 매주 그 교회에 가기를 기도했을 정도였어요. 포켓엔 항상 성경책이 꽂혀 있었고요. 덕분에 제대 후 집안 사정상 학교를 그만두게 됐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교수=나는 고교시절이에요. 60년대 후반 무렵,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방황하면서도 기도했죠. 힘들었어요. 아무도 나를 이끌어주지 않았어요. 그때 인생 최초로 기도원에 올라 기도했어요. 그 후 공부하는 길이 열려 학원에서 청소하고 강의를 들으며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어요. 암흑 같았지만 인생을 바꾼 시기였어요. 그때의 추억은 내 인생을 농축했어요. 하나님과 제일 친한 시간이었죠. 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교회 장로님의 삶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였는데 그분은 양계장을 경영하셨어요. 주중엔 검소한 차림으로 성실하게 일하셨고 주일에는 한 벌밖에 없는 양복을 입고 나와 간절히 기도하셨어요. 그의 성실한 삶과 기도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교회엔 기쁨이 있다

△양 팀장=다들 멋진 추억들이 있으신데 그렇다면 2013년 한국교회는 어떤가요. 교회의 키워드를 꼽는다면요.

△한 학생=90년대생들은 똑똑하고 재능이 많아요. 청년부를 보면 재능을 가진 청년들이 많거든요. 봉사면 봉사, 디자인이면 디자인 못하는 게 없고 특히 영상 분야 기술이 뛰어나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용도 잘해서 소통에 능하고요. 찬양문화 역시 강점이죠. 밴드형 찬양들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음 그리고 요즘 세상이 어둡잖아요. 그래서 더 크리스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쉬워요. 작은 행동 하나로 감동을 줄 수 있거든요. 힘들다는 친구에게 기도해준다는 한마디가 큰 힘이 되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메말라 있어요. 예전처럼 물질적 빈곤은 없지만 마음이 가난하거든요. 그 빈 공간을 교회가 채워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양 팀장=맞아요. 교회별로 전문가 그룹이 많은데 사회 어느 분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열정과 전문성을 갖춘 청년들도 많고요. 교회와 단체에서 훈련받은 크리스천들은 사회생활도 잘 합니다. 특히 리더십이 뛰어나 조직력을 강화시키죠. 한 사례로 교회에서 하던 감사편지 쓰기를 회사 상사나 직원들에게 적용했더니 감동을 받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교수=그래요. 우리가 믿음의 유산을 갖고 있다는 게 축복인데 그 유산을 잘 전해야겠죠. 우리 교회가 변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크리스천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나 예술도 중요한데 우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해요. 그런 삶을 후대에 계승해야 하고요. 한국교회의 진짜 위기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세대가 ‘오직 예수’만 되찾으면 한국교회 부흥의 꽃은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기억나세요?

◇빨간 가방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성 지역장·구역장용 빨간 가방(사진). 구역장들은 가방에 성경과 전도지를 담았다. 현재 여성 지·구역장만 7738명이며, 남성 지·구역장을 포함하면 9616명이다.

◇낡은 성경

한국교회 성장 배경에는 ‘성경 사랑’이 있었다. 70년대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로읽기 방식의 한자·한글 혼용의 ‘개역 한글’ 성경을 많이 읽었다. 사진은 고 김준곤 CCC 설립자가 사용하던 성경.

◇‘민족의 가슴마다’ 차량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당시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는 ‘예수혁명’ ‘성령의 제3폭발’이라는 주제와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구호로 개최됐다.

◇성극·문학의 밤

1970년대 교회는 문화의 중심이었다. 문학의 밤, 성극, 찬양 경연대회 등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1979년 서울의 한 교회 주일학교에서 개최한 성탄 행사에서 초등학생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사진).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