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참 나쁜 일자리

입력 2013-12-21 01:52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맘때면 늘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말한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장성택 총살로 미국 정부까지 나서서 북한 도발 위험성을 경고하니 더욱 뒤숭숭한 세밑이다. 그래도 한 해를 보내면서 얼굴 안 볼 수 없다는 아줌마 친구들의 성화에 지난 주말 송구영신의 모임을 가졌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화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주름살이 누추하기보다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켜켜이 쌓인 정 때문이리라.

웃음과 수다로 출렁였던 모임은 한 친구의 묵언수행으로 침몰했다. 지난여름 초등학교 방과 후 돌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다고 어깨에 힘을 줬던 바로 그 친구였다. 직장을 그만둔 지 30년이나 된 50대 여성이 취업을 하다니! 우리는 그를 ‘박근혜정부’ 수혜자로 부르기로 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경력단절 여성에게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날 밥값을 취직 턱으로 흔쾌히 냈던 그 친구는 수척해져 있었고, 말을 잃었다. ‘별일 없다’는 그에게 ‘우리한테 못할 말이 무엇이냐’는 우격다짐 끝에 들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정부가 추진하는 시간제 일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이었다.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낮 12시30분부터 6시까지 일하고 150만원쯤 받는다고 했다. 근무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일쑤인 데다 대여섯 시간 동안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일하고, 몸이 아파도 결근은 꿈도 못 꾼다고 했다. 또 교사는 물론 학부모들도 사람대접을 않는다고. 몸과 마음을 많이 다친 그 친구는 “집에서도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다”면서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30년 가까이 시중을 받던 남편과 아이들이 쉽게 변할 리 없다. 친구는 어렵사리 얻은 일자리를 포기할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그런 친구의 어깨를 토닥이면서도 내심 ‘집에서 편하게 살아서 그런 게지’ 했다. 그런데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주최한 토론회 ‘압축노동:시간제 노동의 두 얼굴’ 자료집을 보고선 그 친구의 말이 엄살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4시간 계약직에게 전일제(8시간) 노동으로 할만한 업무를 떠안기는, 일명 ‘시간 구겨 넣기’가 예사란다. 또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한다는 비례보호원칙은 얼핏 보면 합리적인 것 같지만 교통비, 명절 상여금 모든 수당을 계약시간에 비례해 지급하는 ‘임금 쪼개기’로 저임금에 허덕이게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시간 선택제 일자리를 대통령 선거 공약의 하나인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주요 정책으로 밀어붙이면서 육아와 가정을 위해 직장을 떠났던 경력단절여성들의 사회 재진입을 돕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간제 일자리는 이명박정부 때도 시행됐다. 이름도 예뻤다. ‘퍼플 잡(purple job)’이라고. 가사나 보육 등 여건에 따라 근무시간이나 형태를 조절하자는 유연근무제로, 골자는 시간제 근무였다. MB 정부 5년 동안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고, 경력단절을 보여 주는 M자형 곡선도 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정부의 시간 선택제 일자리가 퍼플 잡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노동전문가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상적인 정책이 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국내 경제 활성화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본다. 가정과 육아가 여성의 일이라고 전제하는 성 불평등한 관점에서 출발하는 이 정책은 당장은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을 유도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출산율 상승에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발전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사노동과 출산을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시대는 지났으므로.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