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은행권 무한경쟁 예고… 국민·하나銀 수혜자될 듯
입력 2013-12-20 01:36
계좌이동제 실시되면
직장인 오모(54·여)씨는 집 앞 A은행에서 만든 계좌를 30년 넘게 이용했다. A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이용하면서 월급통장을 만들었고 각종 금융 상품에도 가입했다. 오씨는 A은행의 우수고객(VIP) 등급을 받았지만 피부로 느끼는 혜택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 거래를 시작한 딸은 이체 수수료 면제 등 혜택을 받았지만 VIP인 자신은 직불카드로 돈을 뽑을 때마다 수수료를 물었다. 오씨는 나중에 딸이 수수료가 면제되는 카드로 바꿔줘 수수료를 내지 않는 카드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창구거래를 하면서도 이런 내용을 한 번도 안내받지 못했다. 기분이 상해 은행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통장에서 매월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보험료, 관리비, 휴대전화요금, 공과금 등을 일일이 해지하고 다시 신청하기 번거로워 포기했다.
◇계좌이동제로 은행 무한경쟁 돌입=지난달 26일 금융위원회는 ‘금융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금융위는 소비자 선택권을 강화한 은행 계좌이동제를 2016년부터 본격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은행 계좌이동제는 고객이 은행 주거래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기면 기존 계좌에 연결된 각종 공과금이체, 급여이체 등을 별도 신청 없이 자동으로 옮겨주는 시스템이다. 금융위는 이 제도가 시행되면 경쟁 환경이 조성돼 금융권에 혁신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해외에선 이미 계좌이동제를 시행하고 있는 곳이 많다. 유럽연합(EU)은 2009년 11월, 호주는 지난해 7월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2011년 계좌이동제를 도입한 영국은 실적이 부진하자 지난 9월부터 한달 정도 걸리던 이동 기간을 7일로 줄인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효과는 미진하다. 고객들이 옮기면서 얻는 이익이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 은행들은 최소잔고 의무를 두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고객에게 계좌 관리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주거래 고객에 대해서 이런 의무를 면제해주고 각종 수수료 감면 혜택도 부여한다.
반면 외국 은행과 같은 제약이 없어 상대적으로 이동이 쉬운 국내 은행은 완전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될 전망이다. 은행권은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경쟁과열로 인한 수익 악화를 염려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19일 “고객을 끌어오기 위해 우대금리 혜택을 주고 제도를 정착시키고 홍보하는데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 등으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라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은행들은 경쟁에서 도태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는 “고객들이 주거래은행으로 삼는 곳은 대부분 회사에서 지정한 월급통장 은행 혹은 집과 가까운 곳”이라며 “저금리 시대에 은행들이 파격적인 금리를 제공하긴 어려워 (제도가)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어떤 은행이 살아남나=전문가들은 초반에는 높은 금리를 제시하고 지점이 많은 곳이 유리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충성도 높은 고객을 많이 보유하거나 핵심예금 비중이 낮은 은행이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초반에는 금리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며 “금리를 높게 줄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은행과 지점이 많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은행으로 사람들이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지점 수가 가장 많은 시중은행은 KB국민은행, 그 다음은 NH농협은행이다.
이 전문가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금리보다는 은행 서비스 등 정성적 측면이 고객을 끄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우진 선임연구위원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많이 보유한 은행과 핵심예금 비중이 낮은 후발 시중은행이 유리하다”고 전망했다. 김 연구위원은 “브랜드 인지도와 충성도는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국민은행 등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곳은 기존 고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충성도가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계좌이동제로 수시입출식예금의 이동이 잦아지면 유동성 리스크가 커지기 때문에 하나은행과 같은 핵심예금 비중이 낮은 후발 시중은행에 유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객들에게 미칠 영향은=계좌이동제 시행으로 고객 서비스가 좋아지고 금리와 수수료 혜택이 주어질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일각에선 수신금리 경쟁으로 인해 대출금리가 상승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계좌이동제 도입에 따른 기대효과 및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서 제도 도입으로 은행 간 금리 경쟁이 치열해지고 저원가성 상품이었던 수시입출식예금의 변동성 확대로 유동성 리스크가 커지면 은행 수익성이 악화돼 대출금리가 인상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또 다른 전문가는 “경쟁이 격화되면 은행들이 대출금리도 쉽게 올리지 못할 것”이라며 “줄어든 순이자마진(NIM)을 보존하기 위해 내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주로 리스크 관리, 여신관리, 모니터링 등에서 감축이 이뤄지기 쉬워 부실 발생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