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키다리아저씨들

입력 2013-12-20 01:36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세밑임을 알린다. 구세군 여사관 조지프 맥피(Joseph McFee)가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좌초한 난파선 난민을 돕기 위해 큰 쇠솥을 내걸고 첫 종소리를 울린 이후 해마다 이맘때면 세계 100여개 나라에서 자선냄비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맥피는 “이 국솥을 끓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1928년 당시 박준섭(조지프 바아) 구세군 사령관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자선냄비는 ‘사랑과 나눔’의 아이콘이다.

올 자선냄비에도 아름다운 사연이 참 많다. “환갑을 맞았습니다. 기쁘게 받아주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들어 있는 귀금속 10여점, “우리 아이가 1년 동안 열심히 모은 돈입니다. 소중하게 사용해 주세요”라는 사연이 담긴 빨간 돼지저금통, 8년간 헌혈해 모았다는 100장의 헌혈증서 등등.

지난 12일에는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6800만원 상당의 은행 채권을 자선냄비에 넣고 갔다. 지난해와 지지난해엔 각각 1억원을 쾌척한 이도 있었다. 요즘 같은 자기PR 시대에 이들은 한결같이 이름 밝히기를 꺼렸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진정한 선인(善人)이 아닐까 싶다.

우리 주변엔 의외로 익명의 기부자들이 적지 않다. 2000년 이후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천만원을 놓고 사라지는 전주 노송동의 ‘얼굴 없는 천사’가 대표적이다. 노송동 천사가 지금까지 놓고 간 돈이 2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폐지를 주워 생활한다는 대전의 한 80대 할아버지가 평생 모은 2억1000만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 할아버지는 끝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돈이 없어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독거노인을 위해 써달라는 편지와 함께 현금 108만원을 아무 말 없이 주민센터에 건넨 ‘서울 성동구 까치’, 5년째 분기별로 100만원 상당의 라면을 주민센터에 전한 울산의 ‘병영2동 키다리아저씨’, 라면 20상자와 쌀 200㎏을 기탁한 경남 진주시 ‘정촌면의 이름 없는 천사’ 등 고마운 분들이 곳곳에 퍼져 있다.

자선냄비가 끓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자선냄비 모금액이 12월 중순 현재 지난해에 비해 50%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물질적 넉넉함을 무시할 순 없지만 나눔은 그보다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 마음의 부자들이 넘쳐나 이 겨울이 춥지만은 않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