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어른 없는 사회
입력 2013-12-20 01:35
“나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시대가 빨리 와야”
율곡 이이는 5000원권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선비다. 당시 그는 정계의 중진으로 편이 갈린 조정을 어떻게 하든지 화합시키려 무진 애를 섰다. 이발(李潑)과 정철(鄭澈)이 서로 다투자 편지를 보내 마음을 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직업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를 수는 없지 않느냐”며 중간지대의 그를 비난하자 이렇게 일갈했다. 무왕과 백이·숙제의 일은 두 가지 모두 옳고, 춘추전국시대의 싸움은 양쪽 모두 그르다고.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총명했으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던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선조 때의 참절(僭竊)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이가 많다고 꼭 어른인 것은 아닐 것이다. 연령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 비해 소견이 튀어 있으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동물들의 나이 자랑이 구비문학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듯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연장자가 어른 대접을 받는 전통이 존재했다. 서열에 의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전통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어른이 대접받는 사회였다.
요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른이 대접받는 전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른 공경은커녕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다. 나이 든 노인들이 경제적 궁핍과 외로움으로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버스나 지하철에 노랗게 표시된 노약자 보호석에 젊은이들이 버젓이 앉아있는 경우도 많다. 어른이 와도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는다.
어른을 모르는 체하는 전가의 보도는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가 아닐까. 바로 앞에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이 힘겹게 서 있어도 고개를 푹 숙이고 때를 놓친 연예프로그램 보기에 여념이 없다. 도대체 눈을 마주 치지도 않는다.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애써 무관심한 체한다.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일부 종교계에서는 최고 수장격인 어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역공당하기도 한다. 사실 헌법상 정교분리가 엄연한 국가에서 신도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 정치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같은 종교조직의 어른 말은 듣는 것이 정상 아닌가.
우리는 언제부터 어른을 몰라보고 존경하지 않아도 되는 비이성적이고 반윤리적인 사회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공중도덕을 어겨도 어른이라고 자임하는 누구 하나 잔소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가 돼 버렸다. 아파트에서 담배 피우는 중고생을 꾸중한 스포츠 스타가 오히려 영웅대접 받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카오스적인 현상의 원초적인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진보주의적 해석이 틀리지 않는다면 어른 부(不)대접 현상의 원인은 거의 대부분 최고 가치의 충돌이 첨예한 정치세계가 빌미를 제공한다. 가령, 경륜과 나이에 있어 월등한 야당 대표의 말은 같은 당 소속의 초선 의원들에게조차 효력이 없지 않은가. 48%의 지지가 1년 만에 19%로 떨어진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 법이다.
사실 영국이나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장점은 민주주의 의식이 투철한 점도 있겠지만 전통과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봉건시대의 왕조를 국가 상징으로 존치해 둔 것에서 찾는 정치학자들도 많다. 나라의 상징으로 남겨 존경의 염을 보내면서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장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왕실이 관광자원으로까지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
농암 이현보는 정계 은퇴 후 고향에 돌아가 94세의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아버지를 즐겁게 하기 위해 70이 넘은 나이에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도 췄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너나없이 어른이 된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