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한국기독교 사료 발굴·수집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입력 2013-12-20 02:42
‘문헌사역 30년 외길’ 심한보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장
1980년 봄, 서울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그의 삶은 방향을 틀었다. 직전까지 대학의 한국학연구소에서 평범한 서지학(書誌學·도서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였으나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불온서적 소지 혐의가 덧입혀졌다.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빨갱이’로 바라보는 주위 시선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사상서적 쪽으로는 멀리하고 싶더라고요. 그러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기독교 문헌 쪽에 손을 대게 됐지요.”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심한보(66) 원장이 한국기독교사 자료 발굴·수집에 나선 계기다. 1983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30년 동안 심 원장이 남긴 업적은 전무후무하다.
초교파신문 기독신보(1915∼1937)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간했던 잡지 미션필드(The mission field·1905∼1943)를 모두 수집해 묶어냈다. 이 문헌들은 당시 기독교계의 양대 저널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 3대 교단의 간행물로 꼽히는 신학세계(감리교)와 신학지남(장로교), 활천(성결교)까지 모두 찾아내 합본 작업을 완료했다.
특히 총 37권에 달하는 미션필드의 경우, 전체 자료를 모으는 데만 꼬박 4년이 걸렸다. 마지막 한권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미국의 사무엘 마펫(1864∼1939) 선교사의 손자에게까지 연락을 취해 복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국교회사 초기의 중요한 기록물들이 그의 손에서 한데 모아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수집한 기독교계 문헌만 120여종 1000여권. 그의 자료를 통해 논문을 쓰고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만 수백명에 달한다.
지난 14일 오후 2시 서울 성산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 교수)에서는 심 원장의 문헌사역 30년을 기념·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 교회사 연구자들 가운데 심 원장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면서 “198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사의 연구·발전 이면에는 그의 땀방울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찬사를 건넸다. 이덕주 교수는 사료 발굴에 대한 심 원장의 열정을 빗대 ‘무외거사(無畏居士·겁없는 선비)’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심 원장은 100년 전 한국의 기독교 사료를 뒤지면서 인상 깊었던 경험은 초창기 신앙 선조들의 올곧은 신앙과 그에 따른 행동이라고 했다. 1897년 초 아펜젤러 선교사가 발간한 신문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실린 한 부분을 그가 소개했다. “‘1만명이 채 안되는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탐관오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다’라는 문구가 있더라고요.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당시에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행태는 부당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거지요….”
심 원장의 사료 발굴 작업은 시쳇말로 ‘돈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17일 들른 그의 불광동 사무실에는 차남 희승(30)씨가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7년 전부터 심 원장을 돕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국 교회의 역사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심 원장이 아들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사진=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