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녀의 이야기가 증발되는 ‘낯선 결말’… 이장욱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

입력 2013-12-20 01:32


여기, 한 대의 자동차를 타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세 명의 남녀가 있다. ‘정’, ‘김’, ‘최’. 그들은 대학 영화동아리에서 만나 한 시절을 함께했던 여자동창생 ‘A’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중이다. A를 모두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세 사람은 서른세 살 무렵을 통과하면서 어쩐지 패잔병이 된 것 같은 씁쓸함을 곱씹는다.

“정: A는 내게 해독 불가능한 문자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랍어나 희랍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고, 배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문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83쪽)

“김: A는 모든 면에서 아내와 반대였다.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A는 어딘지 무질서해 보였고 예측할 수 없었다. 아내의 세계가 겨울의 희박한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면, A의 세계는 여름의 팽창하는 대기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106쪽)

“최: A는 언제나 와전되는 중이다…… 와전되는 것이 A다…… 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다가, 나는 이상한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124쪽)

A에 관한 세 명의 상이한 견해는 이들 인물의 편협한 생각을 반영할뿐더러, 이 셋을 종합해도 A의 실체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의 진술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매우 주관적인 기억이기에 오히려 충돌과 갈등의 지점이기도 하다.

이장욱(45)의 신작 장편 ‘천국보다 낯선’(민음사)엔 이렇듯 세 사람의 화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의 인식이나 진술은 끝내 융합되지 않는다. 이는 언어로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온전히 복원하다는 게 역부족인 것은 물론 모든 진술엔 그 주관성으로 인해 결함이나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이장욱이 아니다. 그는 끝내 융합되지 않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숨은 작가의 자리를 끄집어내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공중에 뜬 크레인 카메라가 그것이다.

“그 순간 그들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가 천천히 새벽의 허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크레인 숏이 되었다. (중략) 먼 바다 쪽의 수평선에 붉은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천국보다 낯선, 그런 시간이었다.”(249쪽)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모든 이야기가 갑자기 영화촬영 현장이라는 프레임 속으로 함몰하는 이 낯선 서사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라진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야기를 증발시키는 결말에 장엄미가 흐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