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사랑을 바라보는 94세 원로 작가의 고요한 시선… ‘짧은 이야기 긴 사연’

입력 2013-12-20 01:31


로제 그르니에 최신 단편 소설집

불문학자 김화영(72)씨는 지난가을 프랑스 문단의 원로 작가이자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위원 로제 그르니에(94)의 최신작 ‘짧은 이야기 긴 사연’(문학동네) 최종 교정지를 보면서 로제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로제. 안녕하세요. 단편집의 번역 출판 직전인데 불확실한 대목이 있어요. 79쪽, 모로코 작은 마을의 ‘킬로미터 120’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죠? 마을 이름인가요?” 로제로부터 즉시 답신이 왔다. “친애하는 화영. ‘킬로미터 120’은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 장소는 그것뿐 다른 이름이 없어요. 매 킬로미터마다 거쳐 지나온 만큼의 거리가 길가의 경계표에 표시되어 있는 거죠.”

김화영이 불문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숱한 작가들, 예컨대 장 그르니에, 엠마뉘엘 로블레스, 로제 키요, 레몽 장, 자클린 레비 발랑시…… 이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고 없고 이제 남은 이는 1919년생 로제 그르니에 뿐이다. 로제의 단편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을 번역한 김화영은 이렇게 적었다. “발아래로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물가물 심연의 시간 위에 발 딛고 있는 나이가 아닌가. 그런 노령에 그는 아직도 매일같이 집에서 도보로 십여 분이면 도착하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개인 사무실로 출근한다. 간혹 그의 아파트 살롱에서 길 건너편 집 창문에 우연히 커튼이 다 열려 있는 저녁엔 그 집 창문 저 너머로 멀리 불 켜진 에펠탑이 보인다며 즐거워하기도 한다.”(‘옮긴이의 말’)

90세가 넘어서 쓰는 글엔 대체 무엇이 담겨 있을까. 90세라 함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이인 동시에 그가 밟고 온 90계단이 심연처럼 놓여있을 텐데. 평지에서 불쑥 올라온 90세라는 융기지점에서 바라보면 세월의 무늬나 사건들이 하나의 연대기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만큼 르제의 문장은 드라이하되 심연을 내포하고 있고 사유는 깊되 침묵에 가까운 결말을 품고 있다.

단편집엔 읽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보듬어주다가도 불시에 폐부를 찌르는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은 아르헨티나로 이민 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여자동창생과 한때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다락방에서 처음 만난 후부터 서로 호감은 있었지만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 두 사람은 인생 중반기에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서로의 흠집을 감싸 안는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헤어지겠다고 했고 그녀는 남편과 갈라서겠다고 했다. 그런 약속들은 해로운 것이어서 그들의 사랑을 좀먹었다”(187쪽)라든가 “그는 (마침내) 아내와 헤어지고 곧 회사 동료인 다른 여자와 살게 될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말했다. ‘이해해’”(189쪽)

중년의 ‘그’가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눈 ‘그녀’를 마지막 본 건 어느 해 12월 24일이다. “어느 12월 24일, 날이 저물어가는 시간, 어느 지하철 플랫폼에서 그는 그녀가 혼자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램프갓인 듯 부피가 크지만 가벼워 보이는 어떤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더니 사라졌다.”(192쪽)

두 사람은 이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지만 ‘그’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느낀다. ‘그’는 늙어갈수록 더욱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그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될지 알고 싶은 것이다. 로제는 이 엇갈린 사랑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이제 우리가 애정의 측면에서 맛보는 인생의 실패는 사람의 일생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4쪽) 긴 인생을 살고 있는 로제의 문학세계를 김화영은 ‘긴 붕괴 과정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