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리스트의 제자
입력 2013-12-20 01:33
페이스북을 챙겨 보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정·재계부터 스포츠, 연예계까지 유난히 말도, 탈도 많았던 올해. 그때마다 쏟아지는 ‘공유’의 홍수.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좋은 소식들도 많았으나, 투견대회를 보는 듯 고약한 기분이 드는 글들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물고 뜯고 씹고 내뱉는 행위가 ‘좋아요’와 ‘공유’로 무한 반복되는 그곳에서는 차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 사유의 공간이 없어 보였다. 마음이 피곤했다. 수시로 전화기를 꺼내들고 무의식의 습관으로 불필요한 정보와 감정들을 쓸어담던 것을 멈추고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페이스북 잠정 중단. 그 결심을 실행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피아노의 신, 프란츠 리스트의 유명한 일화인 가짜 제자 이야기였다. 19세기 유럽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리스트가 여행 중한 시골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 마을극장에서 연주회가 열린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연주자가 리스트의 제자라고 떠들썩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리스트는 그 피아니스트를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리스트의 제자가 아니었다. 생계형 연주자였던 그녀가 청중을 모으기 위해 리스트의 제자라고 거짓 선전을 한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리스트를 찾아가 사죄하고 연주회를 중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다. 연주를 마치자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고 리스트는 말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소. 이제 당신은 내 제자가 됐으니 연주회를 포기하지 마시오.” 거짓말처럼 리스트의 제자가 된 그녀는 멋지게 연주를 마쳤고, 사기사건으로 기록될 뻔했던 연주회는 그의 넉넉한 마음, 여유와 관용으로 인해 미담으로 남았다.
과연 이 가짜 제자가 오늘날 우리 앞에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리스트의 용서와 가르침을 받기도 전에 SNS를 통해 바로 매장되지 않았을까? ‘리스트 제자 사칭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인터넷상에서 조리돌림 당하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지는 않을까?
무언가를, 누군가를 판단할 때마다 쏟아지는 미확인 정보들과 덤으로 딸려오는 광기에 이끌려 이성을 잃고 헤매는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LTE 폭풍 속에 인간다운 생각과 판단이 위태로운 요즘이다. 내 감정, 내 생각들과 조용히 마주할 시간이 절실한 지금. 감히 선언한다. 나는 천천히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