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13) 내가 그린 ‘한국 풍경’ 벽화… 필라델피아 명물로
입력 2013-12-20 02:36
2001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MFA(Master of Fine Art) 과정을 졸업한 뒤 대학 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수많은 대학교에 채용을 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인터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고 유색인종이란 보이지 않는 편견이 작용했다.대학교수란 직업은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던 중에 필라델피아 시(市) 전속 벽화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추천서를 ‘필라델피아 시청 벽화팀’으로 보냈다. 한 달이 지난 뒤 시청 벽화 디렉터 제인 골드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활동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그녀는 내 그림을 보자마자 “오우 굿”이라고 외치더니 즉시 같이 작업하자고 제의했다.
필라델피아지역 벽화 역사는 1984년부터 시작된다. 거리 벽들이 낙서로 시작돼 벽화로 발전되었고 벽화투어가 생길 만큼 유명해졌다. 필라델피아에는 3000개 이상의 벽화가 있고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도 찾아온다. 특히 제인 골드가 벽화 담당자로 부임한 이후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녀의 안목과 열정이 시를 벽화투어 도시로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벽화를 그린 장소는 필라델피아 북쪽의 앤더슨 센터였다. 나는 중학생들에게 벽화 그리는 기초 그림을 지도하면서 벽화를 같이 그리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중학생은 20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자유분방한 이민 2세 문제학생들이었다. 단 5분도 집중하지 않고 들락날락하면서 내 정신을 빼놓았다.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난 최고 문제학생 5명에게 아낀 점심값을 털어 ‘스파이더 맨’ 영화구경을 시켜주었다.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해 섬길 때 상대는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벽화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사소한 배려가 열매를 거둔 것이다.
훗날 내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박사를 하면서 ‘벽화를 통한 다민족 교육’을 깊이 연구하게 된 동기도 이들이 부여해준 셈이다. 1차 작업을 잘 마치자 새로운 프로젝트가 다시 주어졌다. 이곳 여름 날씨는 섭씨 37도가 보통이다. 그런데 이 여름에 다시 변두리 벽화작업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이 무렵 나는 향수병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한국 풍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싶었다. 한국의 화폭을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옮겨보고 싶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아름다운 한국 사진을 보여주며 허락을 받았다.
난 고등학교 때 수업을 빠지면서 선배들과 그림을 그렸던 ‘부산 성지곡 수원지’를 마음속에서 되살렸다. 맑게 흐르던 개울가 풍경들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그리고 기초 그림으로 재현해냈다. 내 벽화 파트너도 나의 설명을 듣고 아주 좋다고 해 의기가 투합됐다.
무더운 날씨라 육체적으론 힘들었지만 여름 두 달간을 ‘부산 성지곡’을 상상하며 행복하게 보냈다. 이때 그린 벽화 사이즈는 건물 3층 높이의 대형이었다. 벽화가 거의 완성된 어느 날, 교회에서 가깝게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구경을 오셨는데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나를 향해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집사님! 참새들이 집사님이 그린 나무에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죽었어요!”
나는 농담으로 알고 내려가 보니 진짜 세 마리의 참새가 죽어 있었다. 벽화 속 나무를 보고 날아오다 벽에 부딪친 것이 분명했다.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던 화가 솔거의 ‘노송 벽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벽화가 완성된 후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이 무척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운전하다가도 그림을 보고 가족들이 모두 내려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요즘도 이곳은 필라델피아 벽화투어 중 방문객들이 찾는 유명 코스 가운데 하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