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 수놓은 ‘천년의 꽃’… 한겨울에 더 늠름한 백두대간 주목

입력 2013-12-19 01:33


‘능선에 눈보라 몰아칠 때마다/ 햇살 그리워 실눈 뜨고/ 하늘 향한 그리움 지울 수 없어/ 고개 숙이고 천년을 살았다/ 속내 녹아내리는 아픔/ 구멍 난 허리춤에 시린 바람 불 때마다/ 정지된 세월에 지쳐 몸 기울고/ 한때는 먼 별 찾아/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아득한 허공/ 이제 보니 몸이 낮아질수록/ 하늘이 더욱 가깝구나’(김정호 시인의 ‘주목나무’ 중에서)

태백산 덕유산 등 한겨울 백두대간 고봉에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쳐야 더 늠름하게 보이는 나무가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生千年 死千年)’을 산다는 주목(朱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발 1000m 이상 고봉에 뿌리를 내린 주목의 촘촘한 나이테에는 천년 세월의 풍상이 새겨져 있고, 이리저리 굽은 앙상한 가지에는 달빛과 별빛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백두대간 최대의 주목 군락지는 강원도 태백의 태백산. 이곳에 자생하는 주목은 약 4000그루로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고사목은 장군봉(1567m) 일대에 20여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장군봉 최고령 고사목의 나이는 산 날과 죽은 날을 합해 약 1000년.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터줏대감답게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붉은 가슴을 도려내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밑둥치가 삭아 내려도 꿋꿋한 자세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목 고사목은 태백산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앙상한 가지에 눈꽃과 서리꽃이 피는 날에는 새벽부터 유일사 코스 등산로가 사진작가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린다. 같은 순백이지만 눈꽃과 서리꽃은 느낌이 다르다. 앙상한 가지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이 솜이불처럼 포근한 순백이라면 서리꽃은 고사목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강인하고 화려한 느낌의 순백이다. 특히 서리꽃이 햇살에 반짝이며 토해내는 순백은 겨울산이 연출하는 최고의 풍경화.

장군봉 주목 군락지의 해돋이는 황홀경의 연속이다. 오렌지색으로 물든 동쪽 하늘에서 운해를 뚫고 눈 부신 해가 불쑥 고개를 내밀면 찬란한 아침 햇살에 젖은 고사목 가지가 연분홍으로 물들고 햇살을 등진 가지는 남태평양의 산호처럼 하얗게 빛난다. 서리꽃과 아침햇살이 만나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못 낼 대자연의 색채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주목 가지 끝에 해가 걸릴 때쯤 태백산 정상에선 또 다른 장관이 연출된다. 북쪽으로 화방재를 건너 함백산(1573m) 은대봉(1442m) 금대봉(1418m) 매봉산(1303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운해를 뚫고 우뚝우뚝 솟아 있다. 남동쪽으로는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이 농담을 달리하며 수묵화처럼 겹치고 포갠 채로 이어진다. 이 봉우리들이 소백산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내달리면 덕유산을 만난다.

덕유산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에 걸쳐 솟아있는 백두대간 명산으로 정상에서의 조망이 장쾌하다.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멀리 합천 가야산과 산청 황매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남덕유산을 비롯해 지리산 천왕봉 등 백두대간 연봉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계룡산과 칠갑산, 북쪽으로는 속리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덕이 많고 너그럽다는 뜻의 덕유산(德裕山)은 누구에게나 오름을 허락하는 넉넉한 산이다. 무주덕유산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20분쯤 오르면 ‘눈 덮인 하늘 봉우리’란 뜻의 설천봉(1520m). 주목과 구상나무 고사목이 어우러진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는 600m 남짓한 거리로 눈꽃과 서리꽃으로 단장한 나뭇가지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터널을 이루고 있다.

향적봉에만 사는 나무라 하여 향목(香木)으로도 불리는 덕유산 주목은 약 1000그루. 향적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중봉(1594m)까지 능선을 따라 수령 300∼500년의 살아있는 주목과 죽어 천년을 살고 있는 고사목이 어우러져 생(生)과 사(死)의 능선을 이루고 있다.

키 작은 철쭉 군락 속에서 홀로 우뚝 솟은 주목은 전쟁터의 장수처럼 늠름하다.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주목, 산 날과 죽은 날을 합쳐 2000년은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고사목, 매서운 칼바람에 줄기와 가지가 비틀려도 홀로 꼿꼿한 고사목, 죽은 고사목에서 태어난 2세목 등이 설원으로 변한 능선을 수놓고 있다.

주목의 줄기는 화석처럼 단단하다. 매서운 북서풍에 가지는 반대 방향으로 뻗었지만 줄기는 결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꼿꼿하다. 촘촘한 나이테에 천년 세월의 풍상을 담은 고사목의 강직함과 넉넉함 때문일까. 죽은 가지에서 피어난 눈꽃과 서리꽃이 백두대간 운해를 배경으로 새해 연하장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태백·무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