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한반도는 안녕한가

입력 2013-12-19 01:43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처형 후 미국인 친구가 이메일로 안부 인사를 보내 왔다. ‘한반도는 안녕한가?’라는 제목의 메일에는 최근 북한사태를 언급하면서 한반도가 불안해진 것은 아니냐는 걱정이 들어 있었다. 그가 메일을 보낸 데는 사연이 있다. 이 친구는 1996년 5월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필자와 함께 존 밀샤이어머 교수의 ‘강대국 정치론’을 함께 수강했었다.

여름은 찌는 듯 덥고 겨울은 혹독하리만큼 추운 시카고에서 5월은 가장 좋은 때다. 수업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창밖에 펼쳐진 푸른 신록에 넋을 잃고 있는 필자에게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중국이 개입할 것으로 보나?” 옆자리에 있었던 그가 내 노트에 ‘제2의 한국전쟁이 벌어지면 중국이 어떻게 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이야’라며 재빠르게 써줬다. 필자는 중국은 반드시 개입한다고 곧바로 대답했고 나머지 수업시간은 한반도 급변사태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어느 수업시간보다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지만 내 나라 문제가 토론주제가 된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 친구는 당시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물어 왔다. 장성택 처형은 평범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평범한 비즈니스맨인 그에게도 북한의 사정에 궁금증을 갖게 한 모양이다.

북한의 불안전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만간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외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곧 붕괴될 것 같은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김일성 사망 후 대대적인 숙청 바람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있었고 100만명이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혹독한 기근도 겪었다. 경제는 바닥을 모를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지 오래됐다. 이런 사정으로 북한 붕괴론이 제기되곤 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건재하다. 정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북한은 명백한 ‘실패한 국가’이다. 그럼에도 정권의 지속성만은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 김정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해 ‘구(舊)시대’를 청산했음을 과시하고 ‘김정은 표 북한만들기’에 나선 젊은 북한 지도자가 선대(先代)가 구축한 정권의 질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분간은 김정은 유일영도체제가 강화될 것이다. 또 외부사회가 분석하는 북한의 약점이 본격적으로 노출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북한사회의 균열상황은 예기치 않은 일로 급변사태로 급진전될 수 있다.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된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동독 공산당 대변인 권터 샤보프스키의 실언으로 촉발됐다. 당시 동독정부는 주민들의 거센 시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여행자유화조치를 발표키로 했지만 그에게 시행일은 알려주지 않았다. 1989년 11월 9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외국 여행을 하려는 주민은 사전에 신청서를 제출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서베를린과 서독으로의 여행도 자유롭다”고 발표했다. 언제부터 시행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얼떨결에 “지금 즉시 유효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동독정부의 완전 승인이 나지 않은 답변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수만명의 시민들이 국경으로 모여들었다. 국경수비대는 이들을 통과시켜야만 했다. 베를린 장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예기치 않은 사안으로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해 정부가 개입여부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곧 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정부 차원의 계획이 수립돼 있고 군 차원에는 한·미가 공동으로 개입하는 작전계획 5029가 마무리단계에 와 있지만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포함해 검토해야 할 사안이 적지 않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내 상설사무조직이 5년 만에 다시 설치될 예정이다. 첫 번째 과제가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실효성 있는 준비작업이어야 할 것 같다. 한반도 안녕을 걱정해준 친구에게는 ‘한반도는 아직은 안녕하다’는 대답을 보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