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역사 치유의 현장 (3)] 캄보디아 킬링필드, 화해·치유의 여정

입력 2013-12-19 01:28 수정 2013-12-19 16:19


국제기관과 함께 과거청산… 죽음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 아익 학살 센터(Choeung Ek Genocidal Center)’. 지난 2일 아침에도 이곳의 총 책임자인 주어 석틱(Caour Sokty)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위령탑 앞에 서 있었다. 약 3000구의 유골들이 유리창 너머 석틱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편안한 곳에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알리기 위해 당신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유골은 ‘킬링필드’라 불리는 1975∼79년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학살당한 희생자들이다. 편히 잠들지 못하고 유리 안에 전시돼 있는 이 유골 중에는 석틱씨 아버지의 것도 있다.

학살 현장 보존, 역사 교과서 통해 만행 알려

학살 현장 보존, 역사 교과서 통해 만행 알려 청 아익 학살센터는 70년대 후반 크메르루주군이 1만7000여명을 학살한 곳이다. 80년 발견돼 킬링필드의 대표적인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두개골과 뼛조각, 어린이들의 머리를 찧은 나무, 그 시신을 모아놓았던 웅덩이, 희생자들을 처형한 사탕수수나무 가지, 희생자들의 옷가지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석틱씨는 “캄보디아 전역에 이 같은 처형장이 300여개 있다”며 “학살 현장을 보존하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가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유골과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 영혼들의 윤회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며 “학살센터를 없애고 무덤을 만들어 영혼을 기리자고 하지만, 현장을 보존해 킬링필드를 겪지 않은 이들도 캄보디아의 아픔을 알고 같은 참상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막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청 아익 학살센터에는 하루 평균 500∼600명이 찾는다. 입장료를 내면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 15개국어로 학살센터 곳곳을 설명하는 오디오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툴슬랭(Toul Sleng) 대량학살박물관 역시 대표적인 킬링필드의 현장이다. 이곳은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 S-21로 불리던 구금시설로 악명 높은 고문이 자행된 곳이다. 1만5000여명이 여기서 고문을 받았다. 크메르루주가 붕괴할 당시 생존자는 7명뿐이었다. 이곳에서는 각종 고문 기구와 고문 현장을 기록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생존자의 인터뷰 영상과 학살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소개도 있다.

캄보디아는 아픈 역사를 정확하게 보존하는 것이 킬링필드의 과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킬링필드 당시의 사건 자료를 수집해 보관하는 DC Cam(Documentation Center Cambodia)은 미국 예일대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자료를 토대로 교육활동을 하는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만난 DC Cam의 육 창(Youk Chhang) 소장은 “과거를 정확히 이해시키는 교육사업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중요하다”며 “특히 잔혹한 경험일지라도 이를 직시하는 역사교육은 반드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씨는 캄보디아의 단 1종인 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캄보디아에서는 2007년부터 9∼12학년 학생 100만여명에게 크메르루주 정권의 탄생 배경과 만행 등의 역사를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다. 창씨는 “DC CAM은 앞으로 캄보디아는 물론 전 세계에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학살당한 이들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대변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제기관과 손잡고 과거청산

과거 청산의 핵심은 재판이다. 지난 10월 크메르루주 유엔 특별재판소(ECCC)의 체아 레앙 검사는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킬링필드의 핵심 인물 누온 체아(87) 전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82) 전 국가주석에게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구형했다. ECCC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크메르루주 정권 처벌을 위해 2006년 공동 설립했다. 선고는 내년 상반기에 내려질 예정이다.

지난 4일 ECCC에서 만난 정창호(46) 판사는 “재판을 통해 올바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증거의 적법성’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판사는 유엔 재판관으로 선임돼 2년 전 ECCC로 파견됐다. 그는 수사 과정과 증거가 적법한지를 판단하는 예심 판사를 맡고 있다.

ECCC는 2심제로 운영된다. 예심 재판부와 1심 재판부(Trial Chamber)는 캄보디아 재판관 3명과 외국인 재판관 2명 등 각각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상소심 재판부(Supreme Courts Chamber)는 캄보디아 재판관 4명과 외국인 재판관 3명으로 구성된다. 예심 재판부와 1심 재판부는 적어도 재판관 4명, 상소심 재판부는 5명이 합의해야 선고가 이뤄진다. 이는 유엔이 캄보디아 재판관들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도입한 ‘압도적 다수결의 원칙(super majority rule)’ 때문이다.

정 판사는 “대부분이 70년대 사건이어서 30여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재판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이 때문에 재판을 할 때 수사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과 이에 기초한 증거가 적법한지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대량학살을 감행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재판은 ‘정권’이 아니라 책임 있는 개인을 찾아내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적법성이 있는 증거가 확보될 때 전체 재판의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정 판사는 “캄보디아 안팎에서도 ECCC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지만 유엔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끝까지 추적해 국제정의를 세우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정 판사는 “이런 사건은 공소시효가 없다. 전범들은 아무리 늙어도 절대 놔주지 않고 법정에 계속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에서는 79년 크메르루주가 물러간 이후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는 캄보디아국민당(CPP)과 훈센 총리가 과거 청산의 걸림돌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캄보디아에 파견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이완희(47·여) 소장은 “과거 청산이 더 깊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현 정권의 비리가 들춰질 가능성을 우려한 훈센 총리가 전범 재판을 지연시킨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총리 자신이 크메르루주 치하에서 지휘관으로 일하다 베트남으로 도주했던 경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캄보디아는 93년 이후 지난 7월 28일까지 다섯 번 총선을 치렀고 그 결과 훈센 총리가 28년째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번에는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야당 후보 삼랭시와 그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9월에는 시위 도중 청년 1명이 경찰과의 무력 충돌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소장은 “OHCHR은 캄보디아 정부에 과잉 진압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킬링필드를 경험한 기성세대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다르다”며 “이들이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캄보디아의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놈펜(캄보디아)=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