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이토록 적극적인 차 한잔의 시간
입력 2013-12-18 01:38
내가 마신 차 중에서 8할은 커피일 것이고 그중에 대부분은 잠을 깨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자뎅을 선두로 하는 체인커피전문점들이 들어섰는데, 분위기 있게 커피 한번 마셔보는 것이 학원에서 자판기 커피로 잠을 쫓던 내 재수시절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꿈꾸었던 대학시절의 차 한 잔도 고작 도서관 앞 벤치나 학생회관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지금도 방송 전 새벽잠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여유 있는 차 한 잔의 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쪽 시간을 내면서라도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있을 때의 느낌이란 그 자체로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그 바쁜 와중에서도 쌓인 과제와 업무를 뒤로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거리를 내버려두고, 헝클어진 책상 위에, 밥풀 묻은 식탁 위에 제일 먼저 차 한 잔을 놓고 싶은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온 정신을 집중해 드립 커피를 내리는 2분 30초쯤 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친구가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한 10분쯤만 됐으면 참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드립커피는 3분을 넘지 않게 내려야 맛있단다. 그 친구를 보면서 사람은 걱정, 근심, 스트레스를 바닥에 철퍼덕하며 내려놓을 수 있는 단 2분 30초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차 한 잔 이야기는 평화여행가 임영신씨가 쓴 ‘평화는 나의 여행’이라는 책 속에 나온다. 공습경보가 울리는 와중에도 티그리스 강변에서 태연하게 차 한 잔을 마시는 부부이야기. “전쟁이 오고 있어요. 두렵지 않은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걸프전 때도 그랬지만 다시 전쟁이 온다 해도, 폭탄이 쏟아진다 해도 이 강가에 와서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실 거예요. 전쟁이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는 걸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전쟁보다 강한 일상을 가졌다는 걸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나는 이토록 적극적인 차 한 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 뒤로는 몸과 마음의 평화를 앗아가는 전쟁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구절 생각이 난다.
차 한 잔을 내리며 되새긴다. ‘어떤 것도 내 평화를 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겠어.’ 차 한 잔 마신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간단하게 내 안에 평화를 들이는 일이다.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