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돌 잔치 없이 몸 낮춘 연준… ‘디플레 공포’ 시대 새 도전 직면
입력 2013-12-18 01:37
23일(현지시간)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3년 이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의회를 통과한 ‘연준법(Federal Reserve Act)’에 서명했다. 어느 기관이나 조직이든 한 세기를 이어왔으면 성대한 자축 행사가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의외로 연준은 조용하다.
◇연준의 저자세=연준이 발표한 공식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는 ‘사료 수집·보존’이 거의 유일하다. 연준의 역사와 관련된 주요 기록과 문서를 모으고 디지털화하는 한편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는 작업이다.
예정된 학술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도 없고, 연준이 주최하는 ‘100주년 기념전시회’도 없다. 다만 뉴욕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비영리 박물관인 미국금융박물관에서 ‘연준 100년’ 특별전을 열고 있다.
연준의 이러한 ‘절제’는 미국인 상당수가 2008년 금융위기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 연준 책임론’은 지금은 상당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징후를 알아채지 못하고 예방하지 못한 것은 대형 은행들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는 연준에는 아픈 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공화당 등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돼 온 연준에 대한 감시·감독 강화론을 의식한 행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금본위제 도입, 나아가 연준을 폐지해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들의 주장이 여전히 반향을 얻고 있다는 점은 부담임에 틀림없다. 2008·2012년 미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론 폴 전 하원의원은 연준의 해체까지 주장했다. 그의 영향으로 지난해 공화당은 금본위제 검토와 연준에 대한 회계감사 의무화를 정강으로 채택했다.
게다가 폴 의원의 발의로 하원은 의회가 연준에 대한 회계 감사권을 갖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정치권 일각에서 연준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칼을 벼리는 상황에서 연준은 ‘100주년 잔칫상’은 역풍만 불러올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지의 바다에 들어선 중앙은행들=연준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들의 최우선 책무(mandate)는 물가의 안정적 관리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일본 등 선진국의 물가상승률은 억제선인 2%에 크게 못 미치며 디플레이션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정책금리를 제로(0)나 그에 가깝게 떨어뜨렸지만 물가는 최근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2.2%에서 최근 1.5%로 떨어졌다. 특히 유럽이 위험하다. 지난 10월 연율로 환산한 유로지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7%에 불과했다. 1년 전 같은 달에는 2.5%였다. 9월의 미국 물가상승률도 1.2%로 두 달 전에 비해 0.8% 포인트 급락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11월 9일 호에서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속락하는 물가가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큰 고민이 되고 있다며 연준과 유럽 중앙은행은 물가를 인상시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플레이션을 당연히 경계해야 하지만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때 삶은 더욱 힘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버냉키의 실험, 옐런의 도전=금융위기 후 전개된 새로운 환경은 각국 중앙은행에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이 도전에 가장 ‘창조적으로’ 응전한 곳이 연준이다. 연준의 책무로 물가안정과 함께 완전고용이 법률에 명시돼 있다는 점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인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양적완화(QE·Quantative Easing)로 대표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을 통해 막대한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했다. 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져 전통적인 경기 조절 수단인 금리 정책이 무용지물이 된 데 따른 것이다. 정책 금리를 제로로 장기간 유지하겠다고 공언한 가운데 현재도 매달 850억 달러어치의 채권을 사들이고(시장에 유동성 공급) 있다. QE는 햇수로 5년째 이어지고 있다.
‘선제적 안내’ 혹은 ‘향후 지침’이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의 적극적 활용도 버냉키 연준의 작품이다. 버냉키 의장은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6.5%를 웃돌고 향후 1∼2년간 기대 인플레이션이 2.5%를 넘어서지 않는 한 기준금리를 현재 수준인 0∼0.25%로 동결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연준의 의지를 투명하게 공개해 기업과 가계의 ‘기대(expectation)’를 형성하려는 목적이다.
연준의 이러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미국의 경제 상황은 유럽에 비해 나은 편이다. 지난달 미국 실업률은 5년 만에 가장 낮은 7%를 기록했다. 비(非)농업 부문의 고용도 20만3000명으로 시장의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이에 따라 연준이 경기부양을 위해 매달 사들이고 있는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는 ‘테이퍼링’을 조만간 시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늘고 있다. 특히 미국 정치권이 내년 예산안 협의를 원만히 마무리 짓고 정치적 불확실성을 털어냄으로써 출구전략을 고민하는 연준의 부담을 덜어줬다.
시장에서는 아직까지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돌입 시기가 내년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이달 들어 연내 테이퍼링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전문가도 많아졌다. 최근 블룸버그 조사에서는 12월 테이퍼링 시작을 예상한 전문가가 34%에 달했다.
내년 2월 연준 최초의 여성 의장으로 취임이 확실시되는 재닛 옐런 지명자의 비전도 관심사다. 그는 지난달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경기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게 연준의 책무라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물가 안정보다는 실업 감소에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