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공포에… 아파도 ‘완치 소견서’ 써달라는 悲정규직
입력 2013-12-17 01:35
모 건설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 A씨는 지난달 작업 중 허리를 다쳐 경남 마산의 한 정형외과를 찾았다. 4∼6주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지만 A씨는 어떤 이유에선지 3주째에 ‘완치됐다’는 소견서를 써 달라고 병원에 요청했다. 담당 의사 최모(39)씨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내용의 소견서를 작성해 줬다.
다음날 A씨는 다시 병원을 찾아가 “회사에서 완치 통보를 받아오라고 했다”며 “그런 소견서를 받아가지 않으면 회사를 다닐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최씨가 “완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검사는 없다”고 설명해도 A씨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최씨가 A씨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일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준 뒤에야 A씨는 안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최씨는 “추가 치료가 필요한데도 완치 소견서를 받아가려는 환자들이 꾸준히 있다”고 말했다.
통상 ‘허위 진단서’는 교통사고 보험금을 타내려는 ‘나이롱 환자’들의 행태였다. 그러나 불황이 깊어지면서 낫지도 않은 병에 대해 완치됐다는 허위 진단서를 요청하는 환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이 병원에 ‘완치 소견’을 애원하는 건 자리를 오래 비웠다간 직장에서 해고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B씨(48)는 전북 전주의 마트에 점원으로 취직한 지 6개월 만인 지난 8월 냉동창고에서 물건을 옮기다 떨어뜨려 오른발 발가락이 부러졌다. 걷기도 힘들어서 입원 치료를 받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날벼락이 떨어진 건 한 달 뒤였다. 마트는 B씨를 ‘개인 사정에 의한 퇴사 처리’ 명목으로 사실상 해고했다. 마트 측은 B씨에게 “아픈 사람과는 같이 일 못한다”고만 통보했다. 그러나 이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해고 사유와 시기를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고 규정된 근로기준법 27조 위반이다.
지난 3월 충남 논산의 고철회사에 취업한 C씨(36)도 두 달 뒤 고철수거용 집게차에서 떨어져 허리 타박상 및 뇌진탕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회사 측의 요구로 사고 다음날에도 출근해 일해야 했다. 나흘 뒤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았지만 회사 측은 산재 처리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C씨는 회사로부터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 역시 업무상 부상으로 인한 휴업 기간 및 직후 30일 동안은 해고하지 못하도록 한 근로기준법 위반이며 불법 해고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런 법의 보호는 먼 나라의 일이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3 고용노동백서’를 보면 기간제 근로자 다수 고용 사업장 1723곳을 점검한 결과 1252곳(72.7%)에서 4394건의 각종 노동법 위반 사항이 적발됐다. 이 중 사법처리된 것은 13건뿐이다. 1건은 과태료, 2건은 행정처분이 내려졌고 나머지는 해당 사업장에 시정 조치를 내리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부당한 대우를 받은 근로자가 스스로 노동부나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는 수밖에 없다. 장기간이 소요되고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해 어려움을 겪는다.
이관수 노무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는 생계를 위해 아파도 아플 수 없는 처지에 있다”며 “사람이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는 기업과 노동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