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큰 물서 뛰고 싶은데… 누가 우생순 가로막나
입력 2013-12-17 01:29
“유럽에서 뛰는 한국 여자 핸드볼 선수가 왜 한 명도 없나요?”
국제핸드볼연맹(IHF) 소속의 브욘 파젠 기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 12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피오니르 체육관에서 대한민국과 도미니카공화국의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 A조 예선이 끝난 직후였다. 핸드볼 역사와 선수들 면면을 줄줄이 꿰고 있는 그는 과거 루마니아에서 뛰었던 대표팀의 우선희(35)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그렇게 많던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파젠 기자는 “한국 선수들보다 실력이 못한 아프리카 선수들도 유럽에서 많이 뛰고 있다”며 “내 생각에 17번(류은희·23·인천시체육회)과 24번(권한나·24·서울시청)은 유럽 리그에서 충분히 통한다. 이들이 유럽에서 뛰면 실력이 부쩍 늘 것이고, 한국 대표팀도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선수가 유럽 클럽 중에서도 명문 클럽으로 가야 한다”며 마케도니아의 바르다르 등 구체적인 팀까지 거론했다.
과거 한국 여자 핸드볼 선수들은 유럽 팀에 수두룩했다. 2002년 이상은(38)은 세계 최강인 덴마크 여자 핸드볼 리그에서 뛰었다. 슬라겔세에서 1년간 뛴 이상은은 2005년 말엔 스페인 수페르리가에 진출하기도 했다. 2006년엔 허영숙(38)이 덴마크 리그에 몸담았다. 이어 최임정(32), 허순영(38) 등도 덴마크 리그에 합류했다. 2000년대 후반엔 명복희(34), 김차연(32), 오성옥(41) 문경하(32)가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했고, 우선희는 루마니아 리그에서 기량을 뽐냈다. 이들은 모두 2004년 아테네올림픽 ‘우생순’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현재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여자 핸드볼 선수는 전무하다. 유럽 명문 여자 핸드볼 클럽들은 요즘도 꾸준히 한국 선수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이적이 성사된 사례는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일부 국내 핸드볼 실업팀 관계자는 “우리 선수들이 해외에서 뛰기엔 기량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이번 대회에 참석한 프랑스 명문 클럽 메스의 산도르 라크 감독은 “기량이 뛰어난 류은희에 관심이 많다”며 “우리 클럽에 오면 고액 연봉은 물론 자동차와 숙소 등도 제공하겠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대한핸드볼협회에 문의를 해도 답이 없고, 접촉을 자꾸 피하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기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노르웨이 클럽 라빅의 감독과 프랑스 클럽 플러리의 감독도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선수들은 유럽 진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회가 되면…” 하고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구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구단의 이적동의서가 없으면 팀을 옮기지 못한다. 국내 실업팀들은 핸드볼 스타들이 줄줄이 떠나면 가뜩이나 위축된 국내 핸드볼이 더 침체된다는 이유로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허락하는 데 소극적이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 국내 핸드볼도 오히려 더 이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을 때 축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것처럼 스타 몇 명이 핸드볼을 더욱 활성시킬 것이란 얘기다.
일각에서는 국내 실업팀 감독들이 팀 성적 하락을 우려해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선수들이 큰 무대에서 뛰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당장 팀 성적이 떨어지는 걸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구단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눈 앞의 팀 성적에만 집착하다가는 한국 핸드볼은 국제 무대에서 ‘우물안의 개구리’로 전락할 수 있다. 게다가 팀의 주전선수가 더 큰 무대로 진출하도록 돕고 신인을 발굴해 키우는 것도 감독의 임무다.
올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류현진(26·LA 다저스)의 사례를 보자. 한화는 눈앞의 팀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류현진과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해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다. 여자 핸드볼 실업팀들도 대승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베오그라드=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