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박희진 ‘상처와 영광’(뿌리깊은나무)
입력 2013-12-16 01:34
“조명을 짐짓 어둡게 한데다 환기장치가 변변치 못해, 지하실 같던 그 침울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왜 그리 좋았는지. 누구 한 사람 말이 없었다. (중략) 제각기 깊은 상처를 입고 전쟁에서 쫓겨 온 청춘들이 그 무진한 음악의 샘 속에서, 다시 ‘잃어버린 기적’을 찾아 실은 모두 소리 없이 오열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리라.”
원로 시인 박희진(82)씨가 ‘문학사상’ 1979년 10월호에 발표한 시론(詩論) ‘상처와 영광’에 등장하는 1950년대 서울 인사동의 음악다방 ‘르네상스’의 풍경이다. 당시는 서울 명동은 물론 인사동의 다방이나 술집을 출입하지 않는 자는 마치 문인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문인들끼리 서로 몸을 부비며 살던 시절이다. 부산 피란 시절의 궁지를 빠져나온 문인들은 종전 직후, 곧바로 상경해 서로의 안부와 실존의 현재성을 확인하려고 밤도 잊은 채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신진 문인들의 둥지였던 명동의 다방 ‘엠프레스’의 단골은 박희진 자신은 물론이고 이호철 신경림 김관식 박봉우 원형갑 박성룡 등이 있었고 이른바 ‘현대평론가협회’ 멤버인 김용권 이철범 이어령 유종호 등도 있었다. 박희진은 그 시절, 그 세대의 정신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첫째, 신구 세대 간의 정신사적 단절을 막는 최후의 교량적 위치에 있다. 둘째, 전쟁의 상처를 가장 혹독하게 입었던 세대이다. 셋째, 역사의식을 비교적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 세대의 공통점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0대 초 참혹한 6·25전쟁을 겪으며 깊은 영혼의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를 영광으로 꽃피운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제목을 시론 ‘상처와 영광’에서 따왔을지언정, 11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엔 저자가 일제 강점기 우리 시인들의 저항시를 비교 분석한 ‘항일 저항시의 양상’을 필두로 최근까지 60여 년간 출간된 34권에 달하는 자신의 시집 서문·후기·해설과 함께 시작 노트, 문학론, 시평, 문단 교류사 등을 총 망라하고 있다. 저자의 문학적 스승인 조지훈 윤곤강 오상순 구상, 그리고 평생의 문우 성찬경과의 우정과 교류까지 담겨 있어 문학사적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