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줄 서서 커피 사는 재벌 딸
입력 2013-12-16 01:56
재벌 오너나 2, 3세들에 관한 얘기를 검찰발(發) 또는 증권가 ‘찌라시’에서만 접하다 보면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 소스가 아니고선 그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거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기업들이 공식행사 이외에는 오너나 2, 3세 관련 얘기를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에 거론되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재벌 인사들의 긍정적 이면조차도 꽁꽁 감추는 게 꼭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국정감사 증인 채택 문제로 논란이 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었다. 하지만 어릴 적 일본에서 자라 한국말을 빠르게 구사하진 못해도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영어와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다. 일본 노무라증권 런던 지점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해 재무에 능하고 기업분석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또 직원들에게 경어체를 쓰는 등 겸손한 자세가 몸에 배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샤이하다(수줍어하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몇 시간이고 강의할 수 있는 언변을 갖췄다고 한다. 다보스포럼 같은 국제행사에서 원어로 강연할 정도로 영어와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도 글로벌 인맥이 두텁고 영어와 일본어에 능해 ‘국제적 마인드’가 잘 갖춰진 재벌가 자제로 통한다. 그룹 3세들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나,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는 신제품 발표회나 외부 행사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나서는 등 ‘프레젠테이션’ 실력이 수준급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직원들과의 교류에 가장 적극적인 재벌가 인사로 꼽힌다. 한 직원은 15일 “입사했을 때 정 부회장님이 신입직원들과 콘서트장에 함께 갔는데 우리가 춤을 추자 그룹 부회장인데도 우리들 옆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함께 춤을 춰 다들 감동했었다”고 말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회장실에만 있지 않고 실무 부서로 수시로 찾아가 책상에 걸터앉아 직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가 구속됐을 때 20, 30대 젊은 사원들이 마치 옆 동료가 구속된 듯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후문이다. 요즘 증권가에 이 회장 누나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경영권 장악설이 돌고 있지만, 이 부회장이 평소 동생에게 꼬박 ‘이재현님’이라 부르며 예우를 갖춰온 점에 비춰보면 남매 간 지분 다툼설은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상그룹 2세들인 ㈜대상 임세령 상무와 동생 임상민 전략기획본부장은 사내에서 ‘수수한 차림새’와 드러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오너 딸들인 줄 모를 정도라고 한다. 또 구내식당과 회사 밖 커피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직접 줄 서서 밥을 타거나 커피를 사는 등 ‘권위’와도 거리가 멀다고 전해졌다.
이처럼 재벌가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모가 적지 않지만 국민들이 그런 걸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일상적인 면이 아니더라도, 글로벌 경제에 중요한 기업인들이어서 그들의 비전이나 통찰력을 듣고자하는 이들도 많지만 재벌가 사람들이 그런 활동에도 소극적이었다.
새해에는 재벌가 인사들이 국민과 소통할 기회를 자주 갖고, 기업들도 오너들의 긍정적 면모를 적극 알리기를 기대한다. 그게 해당 기업의 부정적 시각을 돌려놓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재벌가 오너들만큼 좋은 ‘스타 마케팅’ 재료가 어디 있겠는가.
손병호 산업부 차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