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그 흔하던 기사식당 어디로 갔나
입력 2013-12-14 01:27
택시기사 손모(53)씨는 최근 모처럼 서울 삼전동 ‘엄나무 닭곰탕’ 기사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3500원짜리 저렴한 닭곰탕으로 유명하다. 고봉밥 퍼주는 인심에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찾아간 곳에는 기사식당 대신 장어요리집이 들어서 있었다. 할 수 없이 삼전사거리와 양재IC 사이의 다른 기사식당에 갔는데, 그 길에 있던 두 곳도 공장과 정비소로 바뀌어 있었다. 손씨는 “즐겨 찾던 기사식당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밥과 함께 정(情)도 파는 곳이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기사식당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불황이 깊어 낮은 가격을 유지하기 어려운 데다 택시기사도 줄고 있어서다. 온종일 운전하다 보니 먹는 게 낙인 ‘기사님’을 위해 담백하게 음식 내놓기로 유명한 기사식당들은 일반인들도 즐겨 찾는다. 그러나 주 고객인 기사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식당들도 문을 닫는 곳이 늘었다.
13일 오후 2시쯤 서울 자양동 기사식당 골목은 예전과 달리 한산했다. 200여m 도로 양옆에 기사식당 30여개가 들어선 서울에서 가장 큰 기사식당 거리지만, 각 식당 앞에는 택시가 2∼3대밖에 없었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이 3군데나 됐고 나머지도 네댓명씩 앉아 있을 뿐이다. 15년간 이 골목에서 주차를 도왔다는 한모(72)씨는 “예전엔 하루 150그릇씩 팔았는데 3년 전부터 손님이 줄더니 이제는 60그릇밖에 못 판다”며 “24시간 하던 식당들이 요즘은 오후 10시면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식당 주인 김모(40)씨도 “재료값은 올라가는데 손님이 없어 난감하다”고 했다.
서울의 택시기사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쏟아지며 크게 늘기 시작해 2009년 9만2366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때까지는 기사식당도 제법 북적였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0년 유럽발 재정위기로 불황이 깊어지자 택시의 ‘공급 초과’ 현상이 본격화됐다. 불황에 택시 수요가 줄면서 그동안 불어난 택시기사들의 주머니는 가벼워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핸들을 놓고 있다.
현재 서울 택시기사는 8만9430명으로 2009년 이후 해마다 500∼1000명씩 줄어드는 상황이다. 택시기사 박모(39)씨는 “최근 요금이 3000원으로 오른 뒤 손님이 확 줄었다. 요금이 올라도 기사 처우는 더 나빠진다”고 불평했다.
서울시는 지난 10월 택시요금 인상에 앞서 택시 노사 양측에 기사 월급 22만9756원 인상, 하루 납입기준금(사납금) 2만5000원 이하 인상 등 가이드라인을 통보했다. 그러나 월급 인상분을 이보다 낮게 책정하거나 최저임금법을 피하려 1일 근무시간을 기준 근로시간보다 줄여 계약하는 등 택시업체의 고질적 횡포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기사식당의 최고 인기 메뉴인 불고기 백반도 불황 탓에 외면받고 있다. 3∼4년 전 4500∼5000원이던 ‘불백’은 최근 6000원 이상으로 올랐다. 식당 주인들은 “고기 등 재료값이 너무 올랐다. 인상폭을 최소화한 가격”이라고 해명하지만 기사들은 “너무 비싸다”고 입을 모은다. 택시기사 김정수(55)씨는 “한 달 죽어라 일해도 200만원 벌까 말까해서 6000원 넘는 기사식당 가기가 부담스럽다”며 “3000원짜리 짜장면 집만 자주 간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