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모금… 홍봉식 사관
입력 2013-12-13 20:00 수정 2013-12-14 01:33
아직도, 자신의 냄비만 채우고 계십니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소리가 있다. 구세군 사관이 울리는 ‘사랑의 종소리’다. 추운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시민들은 불우이웃을 위한 나눔의 때가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겨울비가 내리던 지난 9일, 홍봉식(46) 사관은 단정한 남색 구세군복을 차려입고 서울 종로3가역으로 향했다.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모금을 위해서다. 올해로 30년째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젊은이들과 지하철역 계단에 앉아 낮술을 마시는 노인들, 가게에서 고객을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서 홍 사관은 한 시간여 동안 종을 흔들었다. 팔다리가 저려 얼굴을 찡그릴 법도 했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다 보면 팔·다리·허리 모두 아파요. 야외에서 할 때면 춥기도 하고.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웃으며 합니다. 그래야 누구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지 않겠어요.” 홍 사관은 경기가 어려울수록 자선냄비는 온정으로 뜨겁게 끓었다면서 묵묵히 종을 울리며 시민들에게 나눔을 호소했다.
나눔의 종소리
“술 드신 어르신들이 고함치셔서 자선냄비 위치를 바꾸는 중이에요. 사관님 있을 땐 덜 그런데 혼자 있으면 자꾸 큰 소리로 ‘어린 애가 여기서 뭐 하느냐’고 해서…. 8일간 하다 보니 그게 화내는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어르신들의 소통방식일 뿐이죠.”
홍 사관과 자선냄비 곁을 지키던 자원봉사자 이한라(18)양이 짐을 옮기며 말했다. 나눔의 종소리가 항상 환영받는 건 아니다. 술에 취한 노인이 자선냄비를 향해 소리치기도 하고, 인근 상가에서 항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애로사항에도 이양이 매일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건 가슴 따뜻한 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100원짜리 동전 몇 개 들고 “이것만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노인을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이날 모금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꽤 있었다. 가방 속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꺼내 자선냄비에 넣은 할머니, 한쪽 다리를 절며 몇 천원을 넣은 중년남성도 있었다. 홍 사관은 대부분 이런 이들이 자선냄비에 참여한다고 귀띔했다. 구세군 자선냄비 기부자엔 2년 연속 익명으로 각각 1억원을 기증한 고액기부자인 ‘신월동 주민’도 있지만 3년간 파지를 판 돈 300여만원을 기증한 ‘중곡동 할미’들도 많다.
“자선냄비에 기부하는 이들 가운데 고령자이거나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참 많습니다. 당신들이 어려울 때 자선냄비가 도왔던 기억이 있어 십시일반으로 돕는 거지요. 여유 있어서 돕는 분들은 드뭅니다. 외관상 나눔에 참여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들이 1000원을 넣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요. 금액은 얼마 안 될지 몰라도 나눔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아픔이 사명
기부자의 아픔이 나눔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홍 사관도 고난을 겪은 뒤 섬김의 사명을 확인했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그는 고교 1학년 때인 1984년 처음 구세군 자선냄비를 접했다. 냄비에 모인 돈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고 희망을 준다는 게 좋아보였다. 청빈하고 검소한 사관들의 삶 또한 마음에 들었다. 자선냄비를 알게 된 고1 때부터 길거리에서 자원봉사에 나선 그는 1년 뒤 구세군 사관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의 꿈을 지지하지 않았다. 거센 반대에 부닥친 그는 구세군사관학교가 아닌 인하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공무원이 되려던 그가 사관으로 인생 항로를 다시 바꾼 건 군대에서 당한 사고 때문이다. 고열로 훈련에 불참했던 어느 날, 그를 제외한 소대원 전원이 차량전복사고로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다. 전우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저만 살린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존한 건 감사할 일이었지만 감사기도가 나오지 않았지요. 그렇게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말씀을 주시더라고요. ‘내가 너 쓰려고 살렸다’.”
전우들이 당한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 뜻을 깨달은 홍 사관은 제대 후 1994년에 구세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96년 임관한 그는 시골 개척교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이·미용 봉사를 하고 무료급식 및 공부방 만들기 사역을 펼쳤다. 이후엔 구세군 서대문사랑방에서 노숙인들을 돌봤다. 13년간 시골교회와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했지만 홍 사관은 전혀 힘든 줄 몰랐다. 사관의 삶이 꿈이었던 그는 궂은일도 기쁘게 감당했다.
그러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2009년 1월 아내 김지령 사관이 위암 3기 진단을 받은 것. 홍 사관은 4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아내의 곁을 지켰다.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던 아내는 지난 2월 홍 사관과 두 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주와 구세군의 충성자’로 부르며 열심히 사역해 온 아내를 왜 이토록 빨리 데려갔을까.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힘겨워하던 홍 사관을 붙잡은 건 ‘아픔이 사명’이란 말이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의 책에서 아픔이 제 사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내가 아플 때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제 눈에 더 많이 보였어요. 누군가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아주는 일을 해야 할 텐데, 이 일엔 이들처럼 아픔을 겪은 제가 제격이라고 판단했죠. 사명을 알게 되니 제 상황을 넘어 감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30년째 자선냄비 모금
홍 사관은 명함만 3개다. 2009년부터 4년간 구세군 홍보부장을 맡았던 그는 올해부터 치매노인을 돌보는 구세군 홍제동데이케어센터 원장과 부자(父子)공동생활가정인 구세군 한아름 원장, 구세군복지재단 사회복지정책관을 겸하고 있다. 그가 이렇듯 바쁘게 사역하는 것은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자신이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부자가족 모임인 한아름 스키캠프가 아내 떠난 뒤 1주일 만에 열렸어요. 제 사정을 알리니 그곳에 모인 아버지들이 눈물을 흘려요. 제 아픔이 다른 이의 아픔을 위로하는 순간이었죠.”
아픔이 위로고 사명이란 걸 배운 홍 사관은 앞으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한부모 가정을 위한 특수목회를 펼칠 계획이다. 부자가정이 늘지만 정책적 지원이나 교회의 관심이 적다는 생각에서다. 이들을 위한 영적인 도움을 주는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홍 사관의 바람이다.
이날 종로3가역에서 자선냄비 사역을 마친 그는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화곡역 자선냄비와 역 근처에 있는 구세군 한아름에 가기 위해서다. 오후 8시에야 일과가 끝난다고 했다. 그는 오전에도 홍제동데이케어센터에서 치매 노인과 예배를 드렸다.
세 가지 일에 모금냄비까지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치매 어르신께 설교할 수 있는 분 누가 있어요? 아픔이 사명인 제가 해야지.”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