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흥덕중 ‘흥책망책 프로젝트’] 독(讀)하다, 이 학생들…

입력 2013-12-14 02:27


“흥덕중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작은 중학교가 있다. 전교생은 60명, 교직원도 14명에 불과하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이 학교 가족은 올해 초부터 책에 푹 빠져 있다. ‘흥책망책 프로젝트’ 덕분이다. 마음껏 즐긴다는 뜻의 ‘흥청망청’(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 쓰는 모양이란 뜻도 있음)에서 따온 이 제목엔 마을 이름 첫 자인 ‘흥(興)’과 소망한다는 ‘망(望)’이 합쳐 있다. 책을 읽으며 흥하고, 책을 읽으며 소망을 이루자는 뜻이다. 책향에 빠진 이들의 얘기가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도심 청소년들에게 많은 얘기를 던져주고 있다.

눈발이 날린 지난 11일, 고창 흥덕중에 반가운 손님들이 잇따라 찾아왔다. 전주 동암고 국어교사 10명과 정읍여고 교사, 충남 아산 둔포중 교감이 각각 방문한 것. 이들은 도서관과 공부방 등을 둘러보며 김용락(47) 교무부장으로부터 독서진흥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몇 달 전부터 이들처럼 이 시골학교를 찾는 교육계 인사들이 늘고 있다. ‘흥책망책 프로젝트’ 때문이다. 1948년 문을 연 흥덕중은 올해 3월부터 이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학교 측은 도서관 안에 ‘독서우체국’을 세우고 본관 복도 끝에 ‘쌈지문고’를 개관했다. 교장실 창가엔 ‘책읽는책상’을 놓는 등 언제 어디서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김판용(53) 교장으로부터 나왔다. 지난해 9월 부임한 김 교장은 ‘학생들의 메마른 감성을 책으로 흔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첨단 기기에 중독된 학생들의 마음을 아날로그로 되돌리기 위한 시도였다.

김 교장은 교사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설명한 뒤 힘을 모았다. 고창우체국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 안에 미니우체통 2개를 설치했다. 학교 엽서와 우표를 네 종류씩 제작했다. 이후 학생들에게 책의 줄거리나 좋은 문구를 적어 주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여기에 ‘독서 마일리지제’를 도입했다. 편지를 쓰면 1점, 독후감을 써내면 1점, 선행활동을 하면 1점을 줬다. 학년말에 마일리지가 높은 학생 10명을 뽑아 해외연수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반대로 마일리지가 없으면 1년에 4차례 실시하는 교내 체육대회에서 선수로 뛸 수 없게 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썰렁했어요. 재밌는 게 많은데 굳이 책만 읽고 글을 쓰라는 게 쉽지 않았죠.”

국어교사인 김용락(47) 교무부장은 “학생들 대부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표를 붙여보는 등 초기엔 학생과 학부모들이 적잖이 낯설어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6월부터 손에 책을 든 학생들이 급증했다. 마일리지 점수가 높은 학생 30명을 서울에 데려가 연세대와 롯데월드를 돌아보게 하고 온 이후였다. 학부모들로부터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책만 읽는다”는 듣기 좋은 민원도 들어왔다.

어느 학생은 한 달에 30권 이상 대출해 갔다. 3학년 이정섭군은 “하루에 6권도 읽어봤다. 만화책을 포함해 한 달에 20권 이상 읽고 있다”고 말했다.

편지와 독후감을 쓰니 글 솜씨도 좋아졌다. 군청 공무원에서 은퇴하고 독서우체국을 맡고 있는 이현곤(61)씨는 “‘문자메시지만 보내다가 손으로 편지를 쓰니 느낌이 새롭다’는 아이들이 많다”며 “학생들이 예전엔 ‘단어’만 나열했다면, 이제는 제대로 된 ‘문장’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2학기부턴 윤독(輪讀)도 시작했다. 김 교장과 학생 15명이 매주 수요일 같은 책을 함께 읽으며 얘기를 나눴다. 최근 ‘삼국유사’를 다 읽었고 내년에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도전할 계획이다.

지난달 1∼2일엔 선운사에서 밤샘독서도 했다.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지역 주민 등 70여명이 함께 했다. 꼬박 밤을 새우고 책을 읽은 ‘독(讀)한’ 학생 7명에게는 문화상품권이 선물로 주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해외연수도 갔다. 마일리지 적립에서 상위 10위 안에 든 문진희(3년)·장은주(2년)양, 김준호(1년)군 등 10명이 지난달 22∼25일 중국 베이징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여행비는 모두 학교 측이 부담했다. 학생 가운데 9명은 난생 처음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도 처음 타 봤다. 박현희(3년)양은 “정말 재미난 시간이었다”고 떠올리며 웃었다.

이 같은 변화에 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학부모가 이전의 3배에 이르렀다. 지역사회 시선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진학을 꺼려한 사례도 있었지만 이제는 학군을 옮기면서까지 이 학교로 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학교 측은 조만간 주민 독서동아리를 만들고 책 읽는 벤치도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책을 통해 학교 구성원은 물론 지역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고 있는 흥덕중. 학교 가족들을 만나고 교정을 나오는 13일 오후 바람이 차게 불었지만 ‘설운 날’은 아니었다. 학생과 교사들의 밝은 얼굴에 마음만은 ‘따스한 날’이었다.

고창=글·사진 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