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교회 세우기
입력 2013-12-14 01:31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스물세 살 되던 해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체스코야! 내 집을 세워라. 내 집이 무너져가고 있다. 가서 복구하여라.” 그는 이 말씀을 실제로 무너졌고 또 다시 무너질 기미를 보였던 그 성당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프란체스코는 부친의 돈을 가져다가 성당 복구비용을 댔고, 화가 난 그의 부친은 아들을 지하 골방에 감금시키면서 설득해 보았으나 말을 듣지 않자 결국 교회 법정에 고발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그 자리에서 부친의 돈으로 산 속옷마저 벗어 돌려주고는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가 은수사의 삶을 시작해 결국 성당을 복구했다.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
부친은 길에서 아들을 만날 때마다 욕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프란체스코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몇몇 형제들은 그를 따랐는데 후에 유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가 언급한 이 복음의 양식이란 무엇일까. 프란체스코는 1209년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면서 마태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도 파송 장면을 읽다가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갖게 됐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9∼10절)
그는 이 말씀으로 가난과 순회전도 중심의 단순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런 삶의 방식을 더 확실히 하게 된 계기는 제자인 베르나르도 폰 퀸타발레와 함께 아침 일찍 성당에 가서 복음서를 세 번 펼쳐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은 후부터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마 19:21), 전도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눅 9:3),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는 말씀을 차례로 읽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이 삶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으로 확신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후에 프란체스코회 전도자들은 가난이 어떠한 종류의 노동도 능히 감당할 힘을 주고 또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해준다는 유익한 점도 발견했다.
프란체스코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순회전도 활동에 필요한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라테란 성당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났지만 교황은 거지와 다름없는 남루한 프란체스코를 보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밤 교황은 꿈속에서 종려나무 한 그루가 움터 나와 큰 나무로 자라는 것과, 또 그 나무가 자신이 되돌려보낸 거지란 것을 보게 되었다. 시내를 뒤져 다시 붙잡아온 거지 프란체스코는 수도회 회칙을 내밀고 인가를 간청했다.
그 내용을 함께 들은 추기경들은 지금까지 존재해온 수도원 규칙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며 그렇게 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망설였다. 싼타 사비나의 주교인 요한이 “만일 우리가 이 거지의 요구를 생소하거나 너무 어렵다고 해서 거절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복음적 생활의 한 형태를 인가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조언했다. 그 복음적 생활이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수도복 한 벌과 허리띠와 속옷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더 가지기를 원치 않는 삶이었다.
이 복음적 가난의 문자적 적용을 확신치 못하고 승인을 보류한 교황은 또 하나의 꿈을 꾸었다. 교황청이 있는 라테란 대성당이 허물어져 가는데 한 거지가 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물론 그는 프란체스코였다. 교회를 진정으로 세우는 것은 파리 대학의 정교한 신학도, 교권도, 높고 거대한 교회 건물도, 헌금의 혜택도 아니었다. 가난한 그리스도만큼 가난하기를 원했던 한 명의 거지, 그것이 답이었다. 프란체스코가 그토록 기뻐하고 원한 삶의 방식은 이렇게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프란체스코가 44세 나이로 별세하고 10년 후인 1236년, 유럽에는 1130개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 3만5000명의 수도사들이 활동했다. 수도회가 시작되고 27년 만에 이룬 결과이니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 발전한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둘씩 짝을 지어 보내어 전도함으로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엷어진 유럽을 다시 일깨우고 이슬람권과 극동 등 세상 끝까지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를 두고 보면 마하트마 간디의 다음 말은 참이다. “100년마다 한 번씩만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되고도 남을 것이다.”
교회를 어떻게 복구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 또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어떻게 복구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떠받쳐야 하는가. 21세기의 한국교회는 13세기 유럽과 해법이 달라야 하는 걸까.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전도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처럼 살자, 복음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자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모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알고 있지만 그의 복음적 삶이 가져온 혁명적인 결과는 모르는 것일까.
김진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