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강창욱] 디 아더스
입력 2013-12-14 01:34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한집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집주소를 공유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과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개월 전이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에서 주인공의 어린 딸은 누군가 자신들과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말로 의문과 공포를 일으킨다.
내 집에는 언젠가부터 낯선 이름들 앞으로 우편물이 날아왔다. 발신자는 이동통신사와 신용정보업체였다. 돈을 내라는 통지서였을 것이다. 우편물은 한 달에 한 번보다 짧은 간격으로 발송됐다. 한 달을 참지 못하는 통지서는 독촉을 의미한다. 지난해 말이었다. 내가 2011년 10월에 전세 계약을 했으니 그들은 적어도 그 전에 살던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편물은 집요하게 배달됐다. 해를 넘겨 겨울이 가고 있었다. 발신자들에겐 반드시 받아내야 할 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먼저 보낸 우편물이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같은 우편물을 또 부치는 게 아닐까. 우편물은 유리벽에 부딪쳐 떨어진 새들처럼 빌라 1층 현관 우체통 아래서 뒹굴었다. 이 빌라엔 반송함이 없다. 나는 계속 무시했다.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보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지난 2월 신용정보업체는 ‘우편물 수령 시 연락 요망’이라며 직원 이름과 전화번호를 겉봉에 적어 보냈다. 주인 없는 우편물들과 작별할 때다. 전화를 걸었다. 여자가 받았다. “황○○이란 사람은 이 집에 안 삽니다.” 여자는 언제 이사했느냐고 묻는다. “1년4개월이 넘었어요.” 수화기 너머로 서류를 뒤적이는 기척이 난다. 그는 “내가 갖고 있는 주민등록초본에 적힌 그 사람 주소”라며 이 집 주소를 읊는다. “전에 살던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초본엔 작년 10월 18일 전입한 걸로 돼 있거든요.”
일본 소설 ‘화차’의 여주인공을 떠올렸다. 사채 빚에 신용불량자가 된 여자는 과거를 지우려고 남의 신분을 훔쳐 살아간다. 서울의 황이라는 여자는 내가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까지 받은 집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도 빚 독촉을 피하려고 내 뒤통수에 몰래 자기 이름을 써 붙이고 달아난 것일까.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손이 나를 훑고 간 것이다.
이 집 임대인에게 황을 아느냐고 물었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에요.” “이전에 살던 사람 아닌가요.” “아뇨. 바로 전엔 다른 신혼부부였고 그 전엔 저희가 살았어요.” 임대인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죠?”라고 묻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다음날 동사무소로 갔다. 얼굴 없는 여자가 내 가족의 신상정보를 하나하나 채집해 ‘이 집이면 되겠다’며 전입신고를 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전입세대 열람 내역에는 분명 다른 사람도 내 집에 세대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황이 아니라 임○○이었다. 임은 이동통신사의 우편물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는 내가 전입하고 10개월 뒤인 지난해 8월 10일 전입했다. 내가 어렵게 세를 얻은 집 주소가 실은 아무나 와서 드러눕는 무주공산이었단 말인가. 전입은 신고서만 쓰면 다 받아준다고 공무원이 설명했다.
임을 주소지에서 말소시키려고 사실조사 의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황도 비로소 신상을 드러냈다. 그는 임의 아내였고 남편보다 두 달여 늦게 전입신고를 했다. 중학생 나이인 두 아들이 있었다. 나는 자식까지 딸린 부부가 왜 남의 집에 숨어사는지 묻고 싶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잠시 보여준 서류에서 임의 전화번호를 외웠고,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걸었다. 임은 받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용정보업계 관계자는 말했다. “그런 형태의 미싱(행방불명)이 꽤 있어요. 채무를 회피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죠. 뭐 자녀들 학교 문제 같은 것들 때문에 어딘가 적(籍)은 필요하고.” 이런 사람은 못 찾는다고 그는 잘라 말했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렇겠나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채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경우도 많아서요. 무조건 다 선량한 채무자냐. 애매합니다.”
얼마 후 집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황○○씨 댁이죠?” 신용정보업체 직원이었다. 황은 여기 살지 않고 나는 말소 신청을 했다고 설명했지만 내가 그였더라도 나를 의심했을 것이다. 남자는 내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별반 다르지도 않은 질문들을 반복하다가 지친 기색으로 돌아갔다.
임의 가족은 내 주소지에서 말소됐지만 우편물은 발신자를 바꿔가며 계속 날아오고 있다. 영화 ‘디 아더스’는 유령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영화에서 집주인 가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을 내놓지만 나는 이 집을 내놓고 마땅히 갈 데가 없다. 나는 내 집이 임과 황의 행방을 숨기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상상을 사실처럼 받아들인 지 오래다. 늦은 밤 귀가해 현관문을 열면 컴컴한 어둠 속에 두 아들을 부둥켜안고 숨어있는 부부가 보일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저들도 숨 막히는 삶을 살고 있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강창욱 국제부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