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8) 첫 수업부터 영어와 전쟁… 주님은 내게 友軍을
입력 2013-12-13 02:45
미국 시튼홀 대학 학부에 입학해 첫 수업에 참석했다. 그런데 영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의욕만 앞서 무모하게 도전한 결과였다. 이해를 못하는 강의는 결국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었다. 영어가 너무 어려워 차라리 수화를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런데 그 수화를 가르치는 것도 영어라니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 토플시험을 치렀지만 점수가 오르지 않았고 나는 부족한 영어를 위해 ESL과정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영어를 못해 손해 보는 일이 많았다. 학교개교기념일이나 특별행사 등엔 수업을 안 하는데, 안내를 이해 못해 나 혼자 학교에 와 바보가 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로 구걸해야 살아남는데, 이렇게 벙어리처럼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고 박사 학위를 딴단 말인가.”
나는 영어라는 큰 벽에 막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지혜를 주셔서 빨리 영어를 익히고 교수의 강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위해서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교수들을 자주 찾아가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젊은 학생들 사이를 일부러 파고 들어가 점심을 함께 먹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롤러 브레이드를 타고 캠퍼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이 40세에 머리에 헬멧을 쓰고 무릎보호대를 찬 채 돌아다닌 내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난다.
빠른 영어습득을 위해 기도하던 내게 응답이 왔다. 유학 온 한국인 수녀님이 계셨다. 나보다 손위인데 내가 영어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자 선뜻 자신이 수업이 없는 시간에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
“정한씨. 그 고충 내가 알아요. 내 친구도 큰 뜻을 품고 미국에 왔다가 영어가 너무 어려워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답니다. 영어는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예요.”
이렇게 도움도 받고 좌충우돌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공부에 온 힘을 쏟았더니 조금씩 영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이해가 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영어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혼자 덩그러니 집에 와 앉아 있으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신나게 놀던 생각이 나서 모든 것을 접고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왔기에 지금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주일이면 한인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해 뜨겁게 기도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이 무렵 만난 안토니오 트리아노 교수는 내게 잊지 못할 스승이다. 그에게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는데 참 잘 가르쳤다. 강의 내용을 100%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학생들을 관찰해 교수가 지시했거나 원하는 내용을 파악,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
트리아노 교수는 내게 “미스터 리, 걱정 말고 열심히 해. 너는 굉장히 탤런트가 있어”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자신감이 솟았고 더 열심히 했다. 그분의 한마디는 내 인생에서 자신감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트리아노 교수는 어느 날, 교실 자동 연필깎이가 고장 나자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을 위해 일일이 연필을 깎아주었다. 그 모습이 내겐 실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강의를 듣는 과목별 지도교수들은 나를 연구실로 불러 개인지도까지 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이 든 동양인 학생을 위한 배려였다.
난 교수들을 찾아갈 때마다 학교 매점에서 파는 커피를 한 잔 산 뒤, 두 잔으로 나누어 교수님께 한 잔을 갖다 드리곤 했다. 교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학생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내 행동은 이상하게 비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모두 고마워하며 ‘잘 마시겠다’고 했다. 자주 그러다 보니 매점직원은 내가 가면 커피를 넘칠 듯 담아주고 빈 컵까지 챙겨 주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