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 21세기 서울 거리를 산책하다… 류신 중앙대 교수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입력 2013-12-13 01:33


소설가 박태원(1909∼1986)이 80년 전에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씨가 21세기 서울의 거리를 다시 산책한다면? 한국 최초의 근대적 거리 산책자인 구보는 오직 두 다리만을 사용해 하루 동안 청계천 일대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21세기 구보는 도보 외에도 버스, 지하철, 택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급격히 확장된 서울을 돌아볼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보는 서울 곳곳에서 자본주의 소비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날아간 비둘기를 쫓아 소공동으로 길을 건넌 구보는 을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롯데호텔 로비로 들어가 지하 아케이드로 내려가면서 벤야민이 말한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아케이드는 교통수단의 위험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비바람도 차단하여 궂은 날씨에도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안락한 기분 속에서 진열된 상품을 구경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유리 지붕만 없을 뿐이지 롯데호텔 지하 아케이드는 지상의 아케이드와 마찬가지로 산책자 구보가 무의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아케이드의 통로는 실내이면서 거리였다.”(롯데호텔 아케이드)

구보씨를 오늘의 현실로 불러낸 이는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류신(45) 교수. 그가 낸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이라는 부제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민음사)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모티브를 얻은 문학적 서울 탐방기에 해당한다.

구보는 이제 서울광장에 멈춰 선다. 새로 지은 서울시청 건물은 한국 전통가옥의 처마를 재해석한 건축물이라고 들었는데 그는 오히려 옛 서울시청 건물을 집어삼키는 성난 파도 같다는 인상을 먼저 받는다. “건물의 라인을 자세히 관찰하자니 세기말 유미주의자 오브리 비어즐리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삽화에 그린 여인의 고혹적인 S라인 같다는 야릇한 생각도 들었다.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선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퇴폐성을 꼬집은 아르누보 미학이 공공건축에 응용되는 섹시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실없이 웃었다.”(‘서울시청’)

따지고 보면 서울은 1년 365일 공사 중이다. 용산 곳곳에 외팔 십자가처럼 꽂힌 타워 크레인은 지금의 서울을 고발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세운전자상가처럼 이제는 몰락한 욕망도 있지만 그 너머엔 지금도 타워 크레인이 솟아오른다. 개발은 ‘재’라는 접두사가 붙으면서 영원한 동력을 얻었다. 1990년 수도권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개발 욕망은 21세기에 다시 서울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것이다. 구보는 이런 상념과 함께 광화문 사거리 근처 청계광장에 세워진 미국 팝아트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셔 반 브뤼겐 부부의 공동 작품 ‘스프링(spring)’ 앞에 선다. “혹자는 서울시에서 가장 보기 싫은 환경 조형물이라고 비난했다. 굳이 35억원이라는 비싼 몸값을 부담하며 이런 기둥을 도심 요지에 설치해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반론도 제기됐다. 그러나 구보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스프링의 존재 가치를 매겨보았다. 덕분에 광화문 광장의 권위적인 색채를 완화해 줄 것이다.”(‘청계광장’)

구보의 발걸음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한강 철교로, 63빌딩으로, 홍대 입구로 이어진다. 과연 21세기 서울을 걷는 저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사유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서울을 어슬렁거렸다. 서울 거리를 산책하며 완벽한 익명성의 관음(觀淫)을 즐기는 고독한 군주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울은 비정한 사실주의와 불온한 초현실주의가 길항하는 난해한 텍스트였다‘”(책머리에’)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