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소크라테스·공자, 민주주의 싫어했다

입력 2013-12-13 01:39


책의 정신/강창래/알마

최근 출판 시장의 위기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형서점의 점장이 한 말입니다. “책 안 읽는 사람 중에 의외로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몰라서 안 읽는다는 사람이 많아요.” 출판 기자가 된 뒤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역시 “요새 어떤 책이 좋아요? 무슨 책을 읽어야 되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마다 취향도 다르고 상황도 다른데 덮어놓고 뭐가 좋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읽는 사람이 재미있다고 느끼면 그게 좋은 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말이 길었던 이유는, 이 책을 고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책이 좋은지, 어떻게 책을 읽어야할지 묻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좋은 예시 답안은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고전’이나 ‘좋은 책’이 얼마나 허약한 근거와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보여주면서 자유로운 책 읽기, 즐거운 책 읽기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 책의 등장이 저에겐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자는 2005년부터 느티나무도서관재단의 장서개발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서, 도서관 활동가를 상대로 강의해왔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풍부한 지식을 재미있게 소개하면서도 깊은 통찰로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해서 인기를 끌었죠. 누군가는 재야의 고수라고 부르더군요.

그는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편견이다”고 전제하고 책 읽기를 시작합니다. 그 편견은 어떻게 해소할까요? “수많은 편견을 접함으로써 편견을 해소하라”고 하네요.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풍경을 보고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에 올려 다른 이의 반응을 보고 교감하는 것처럼, 책에 대한 생각을 타인과 나눠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는 프랑스 대혁명을 가능케 한 것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같은 사상서가 아니라 그 당시 유행했던, 포르노에 가까운 연애소설이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이어 ‘고전은 정말 위대한가’라고 물으며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공자의 ‘논어’를 어떻게 읽을지 살펴봅니다. 여기선 이 장을 중점적으로 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BC 469∼BC 399)와 공자(BC 551∼BC 479)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부터, 진리를 지키고자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공자는 또 어떻습니까. 인문학 열풍에 ‘논어’의 한 구절쯤은 인용할 줄 알아야 교양인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됐죠. 그런데 그 책들 읽어보셨나요? 정말 그 책들이 좋던가요?

저자는 서양 철학의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통해 우리의 환상에 도전합니다.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사상은, 사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민중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 뒤 변론한 것을 기록한 ‘변명’은 플라톤이 쓴 것입니다. 플라톤은 20세 때 63세의 소크라테스를 만났고, 소크라테스가 죽고 나서 한참 뒤 이를 기록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인지,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알게 뭐야”라는 시니컬한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의 생각을 그의 저서로 알 수 없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문제입니다.

동양의 가장 빛나는 고전 논어도 비슷합니다. 논어 역시 공자가 쓴 글이 아니라 그의 사후 제자들이 남긴 기록을 엮은 것이죠. 더구나 진나라가 들어선 뒤 ‘분서갱유’가 일어나면서 상당수는 훼손되고 사라졌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문건들을 집대성한 ‘논어집해’는 공자가 죽은 지 700년 후 나왔습니다. 한국,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논어는 그나마 12세기 송나라 때 주희가 엮은 ‘논어집주’였지요. 그래서 저자는 조선에서 유통된 공자님 말씀은 주희의 해석본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자처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민중을 경멸했다”고 합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 중국의 시인 소동파 등의 비판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논어’에 대해 “너무나 싱겁고 당연한 이야기”라고 꼬집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남아 200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칭송받고 있을까요. “오래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필요한 만큼 적당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 모른다. 그것들을 변형시켜 살려낸 이들은 그 주인공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그 성인의 입을 빌려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을 강요했던 것이다.”(176쪽)

저자는 이 두 책을 읽은 방법과 그 과정을 통해 내린 결론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고전 타이틀에 얽매이지 말고 비판적으로 책 읽기를 권유합니다. 어쩌면 이 책 역시 ‘저자의 편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생각에 흥미를 느껴 비슷한 길을 따라 걸어볼지, 아니면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정반대의 길을 걸어볼지는 전적으로 독자들 마음에 달렸습니다. 이 서평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가 생겨 독자들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진다면, 어떤 책이든 상관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