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바다는 詩도 쓰고 노래도 부른다… 이문구 ‘관촌수필’의 무대로 해안선 따라 절경
입력 2013-12-12 01:54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 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문구(1941∼2003)는 연작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 8편 중 두 번째 작품인 ‘화무십일(花無十日)’에서 고향인 충남 보령의 관촌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변해버린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어린시절을 추억했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보령 머드축제’로 상전벽해가 된 고향 보령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으로 무엇을 꼽을까.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 등 아름답고 신비로운 해변과 7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보령의 바다는 여름 못지않게 겨울에도 볼거리와 즐길거리, 그리고 먹거리가 풍성하다. 특히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의 낙조를 비롯해 하늘과 바다를 황금색으로 채색하는 보령의 해넘이는 노루 꼬리만큼 남은 계사년의 날들을 더욱 황홀하게 한다.
보령 겨울바다 여행의 출발점은 천북 굴단지와 보령방조제로 연결된 오천항 일대. 전국 키조개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오천항은 바다가 육지로 파고든 만(灣)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호수 같은 바다가 천수만이고 그 바다 너머의 육지가 안면도이다. 바다낚시로도 유명한 오천항은 조선시대만 해도 서해를 지키는 주요 군항이었다.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지키고 왜구의 침탈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충청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눈 부릅뜨고 오천항을 지켜보는 충청수영성은 차도로 헐린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곽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수영성의 트레이드마크인 아치형 돌문을 들어서면 순식간에 수백 년 세월을 뛰어 넘어 조선시대로 여행을 온 듯 고즈넉하다. 수영성에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던 진휼청과 장교들의 숙소였던 장교청, 그리고 성곽 등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진휼청 옆에는 느티나무 나목 몇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오천항에 정박 중인 선박들이 배경이 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화를 연출한다.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보령 바다는 가수 윤형주가 작사·작곡한 ‘조개껍질 묶어’가 1970년대에 전파를 타면서 낭만의 바다로 변신한다. 동양에서 유일한 조개껍질 해변으로 길이가 3.5㎞인 대천해수욕장은 보령머드축제가 유명세를 타면서 지구촌 젊은이들도 즐겨 찾는 해변. 축제가 열리는 여름뿐만이 아니라 한겨울에도 낭만을 찾아 나선 젊은 연인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서울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친구 송창식을 만나 의대생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윤형주는 1970년 8월에 친구들과 대천 바닷가를 찾았다. 여기서 만난 여대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윤형주는 갑자기 떠오른 악상과 가사를 친구들이 급히 만들어준 오선지에 옮겨 적었다.
불과 30분 만에 탄생한 추억의 노래가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이다. 이문구가 ‘관촌수필’에서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윤형주 노래비’가 세워진 대천해수욕장은 세월과 무관하게 오늘도 낭만을 노래하고 있다.
대천 바닷가는 홍길동이 훈련을 했다는 삽시도를 비롯해 녹도 호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에 전시한 수석처럼 보이는 명소이다. 특히 대천해수욕장에서 4㎞ 해상에 위치한 다보도는 기암괴석과 파도에 씻긴 하얀 차돌 해변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무인도. 동지를 전후해 다보도 옆으로 지는 해가 겨울바다의 낭만을 더한다.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남포방조제는 드라이브 명소로 탐조전망대 역할을 한다. 이른 아침에 남포들녘에서 날아오른 기러기들이 태양 속으로 너울너울 날아가고, 가창오리 가족은 황금색으로 물든 경정훈련장 수면에서 한가롭게 자맥질을 한다. 남포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섬에서 산으로 변한 남포 들녘의 보리섬(맥도)은 통일신라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이곳 풍경에 반해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유서 깊은 곳이지만 세월에 닳고 닳아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먼 바다가 온몸으로 달려와서/ 육지를 물어뜯고 요동치며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갈라진다./ 그러나 육지와 바다는 마침내/ 약속이나 한 듯 한 몸을 이룬다./ (중략) / 무창포의 사랑은 다홍색 펄펄 끓는/ 뜨거운 뜨거운 사랑이다.’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을 전후해 하루에 두 번씩 해변에서부터 바로 앞의 석대도까지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는 1928년에 서해안 최초로 개장된 해수욕장.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무창포도 이곳 출신 홍완기 시인의 ‘무창포의 사랑’으로 인해 문향 그윽한 바다로 거듭났다.
바닷물이 저만치 물러나면 드러나는 신비의 바닷길은 1.3㎞로 높은 곳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 있다. 신비의 바닷길 안쪽 갯벌은 굴, 게, 조개 등 해산물들의 보고(寶庫). 목도리와 고무장갑으로 무장한 어민과 체험객들이 삼삼오오 쪼그려 앉아 호미나 삽으로 숨구멍을 헤집자 바지락을 비롯한 조개가 줄줄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창포의 사랑’은 갈라졌던 바다가 한 몸이 되기 위해 다시 모이면서 완성된다. 거친 질감의 갯벌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던 노부부가 바다에서 물러날 준비를 한다. 머리가 허연 지아비는 지게에 조개꾸러미를 잔뜩 짊어지고, 지어미는 커다란 통에 개흙을 뒤집어 쓴 게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워 담는다.
노부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갈라졌던 바다가 한 몸이 되면 ‘무창포의 사랑’은 다홍색으로 펄펄 끓어오른다.
보령=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