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역사 치유의 현장 (2)] 관동대학살 90년, 고통의 현장에 서다(하)
입력 2013-12-12 02:31
“그 날 비극 공동 진상규명으로 시민·종교적 화해 이뤄야”
日 기독 사학 세이가쿠인대 아쿠도 총장과 강상중 교수 공동 인터뷰
바야흐로 세계는 용서와 화해, 공존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대다. 관동대학살 90주기를 맞은 한국과 일본은 대학살 진상 규명이라는 산을 넘어 양국 사이에 깊이 파인 과거 상처의 골을 메워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있다. 참 지혜가 필요할 때다. 일본의 신흥 명문 기독교계 종합대학인 세이가쿠인대 아쿠도 미츠하루(62) 총장과 이 학교의 차기 총장 내정자이면서 ‘재일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강상중(63) 교수를 함께 만났다. 공동 인터뷰는 지난달 27일 도쿄 사이타마현 아케오시에 있는 세이가쿠인대 아쿠도 총장 집무실에서 진행했다.
-지난달 중순 주일 한국대사관이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재일 한국인 일부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관동대학살 90주기를 맞은 상황에서 정부 당국에 의해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쿠도 총장=먼저 일본인의 한사람으로서 굉장히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희생자 신상정보 공개는) 희생자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마음을 품고 일본이 이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시그널 같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는 작업이 우리와 후대의 사명이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 단체와 양국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관동대학살 진상규명 활동이 수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작업은 왜 필요한가.
△강 교수=먼저 최근 홋카이도 지역에서 목격한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강제징용자로 일본에 끌려왔다가 희생당한 이들의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을 지켜본 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젊은이들, 불교 승려 등도 동참했다. 작업 과정에서 참여자들 사이에 충돌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작업 과정이 이어지면서 화해의 감정이 생겼다고 하더라. 유골을 파내려가는 작업이지만 그것은 곧 ‘역사를 파내는’ 작업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살아 있었다는 ‘유골(역사)’을 파내 그것을 반환해주는 작업까지 이어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역사의 원한을 극복하고 화해를 향해 손 내미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관동대학살의 진상규명 활동 역시 유골 발굴 작업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아쿠도 총장=기독교 신앙을 가진 목사로서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신학적 시간 속에서 들여다보면 이 작업(관동대학살 진상규명)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신학적 시간 속에서 살아 있다고 믿는 한 이 비극의 과거사는 결코 풍화(風化)되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 과거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모두에게 알려지는 순간부터 용서와 화해의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규명은 모든 활동의 우선순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민초(民草)라 할 수 있는 한·일 시민단체들의 풀뿌리 진상규명 활동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를 통해 한·일 양국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강 교수=90년이 지난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보는 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한·일 관계의 역사가 어떻게 엮어져 왔는지 함께 고찰해 보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피해 및 가해 국가의 후대와 시민들이 함께 밝혀 나간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 규명 이상으로 죽음을 넘어 화해까지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아쿠도 총장=관동대학살은 에고이즘(egoism·이기주의)으로 뭉쳐진 국가적 광기의 표출로 바라볼 수 있다. 일본은 에고이즘을 넘어서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과거를 통해 상대방(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나와야 하고, 서로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공존과 공생의 법칙을 깨우쳐야 한다.
-관동대학살 문제를 포함, 용서와 화해를 위한 한·일 양국의 과거청산 해법은 무엇이라고 보나. 크리스천 정치학자(강 교수)로서, 신학자(아쿠도 총장)로서 답변해 달라.
△강 교수=화해(reconciliation)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화해, 인간적 수준의 화해, 종교(신앙)적 화해 등이다. 작금의 한·일 관계 현실은 국가 수준의 정치적 관계가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즉 국가 간 에고이즘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상황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국가적 에고이즘에 발목을 잡혀 있다. 따라서 시민적 수준의 화해 노력이 중요하다. 이 노력이 힘을 얻으면 인간적 수준의 화해로까지 이를 수 있고, 나아가 한·일 양국의 화해로까지 깊어질 수 있다. 이런 과정 선상에서 본다면 한·일 시민단체의 진상규명 활동은 중요하다. 지금의 동아시아 정황을 보면 ‘시민사회’가 하나의 제도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국가 차원의 화해를 궁극적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나 정치적 차원에서의 화해가 없다고 해서 시민사회의 화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민사회에서 화해를 리드해 나가고 크리스천 등을 중심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때 더 깊은 수준의 화해 움직임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쿠도 총장=관동대학살은 섬나라 일본이 수많은 재해를 당해오면서 형성된 ‘원시적 애국주의’가 왜곡된 행태의 성격이 짙다. 상처 입은 민족주의에 에고이즘까지 겹치면서 드러난 광기의 움직임이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학살)의 형태를 띤 것이 아닐까. 가해자인 일본으로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 수는 없지만 과거의 아픔을 통감하고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등) 주변에서 일본이 용서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성경 속 사울이라는 인물을 보자. 이 사람처럼 굉장한 에너지와 폭력성을 지니고 예수를 핍박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다. 바로 그때 아나니아가 그를 위해 용서를 구하는 안수기도를 한 뒤 사울은 눈을 다시 뜰 수 있었다(행 9:10∼19). 그 후로 사울에게는 어떤 인생이 펼쳐졌는가. ‘바울’로 이름을 바꾼 그는 평화와 화해의 사도로 쓰임받게 되었다. ‘사울에서 바울로’ 변신하게 된 데는 ‘용서’와 ‘기도’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을 신학자로서 말씀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국민에 대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강 교수=홋카이도의 강제징용 희생자 발굴 모임에서 인상 깊은 점을 발견했다.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을 현장에서 발굴하고 보니 수적으로 일본인이 많았다. 일본의 서민들이 거기에 더 많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일본 역시 그동안 진상을 덮어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고통과 더불어 일본의 고통도 함께 묻혀 있었다는 데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 모두가 한번쯤 되새겨볼 장면이 아닐까.
△아쿠도 총장=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커다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한국과 한국의 교회들이었다. 그동안 재난을 당했던 일본의 마음이 에고이즘으로 꽁꽁 뭉쳐 있었다면 그 마음을 감사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이 먼저 이 마음을 품고 나설 수 있지 않을까. 남 듣기 좋은 위선적인 감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감사로 일본과 한국은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강상중 세이가쿠인대 전학교수=재일교포 2세. 와세다대 정치학과 및 동대학원(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 국적 재일교포로는 처음으로 도쿄대 교수가 됐다. 지난 7월말 세이가쿠인대 차기 총장으로 내정됐으며, 내년 4월 취임 예정이다. 현재 같은 대학에서 특정학과에 속하지 않은 전학교수(全學敎授)로 재직 중이다.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의 저서와 함께 활발한 저술·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쿠도 미츠하루 세이가쿠인대 총장=히토쓰바시대학 사회대학부·법학부를 졸업했다. 화학회사를 다니다 신학에 입문, 도쿄신학대 신대원(신학석사)을 마치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수학했다. 현재 학교법인 세이가쿠인 이사장 겸 원장 및 세이가쿠인대 총장을 겸하고 있으며, 도쿄 아라카와구 부정방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학교의 형성과 도전’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섬긴다’ 등이 있다.
도쿄=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