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7) 어머니가 박사학위 받았던 美 시튼홀 대학으로
입력 2013-12-12 02:34
1996년 4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다. 나를 보내는 아내와 두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그래 반드시 공부를 마치고 당당하게 귀국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이 땅을 밟을 것이다.”
비행기가 상공을 차고 올라갈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아내의 얼굴이었다. 아내는 내게 늘 기도하는 모습으로 각인돼 있었다. 특히 남편을 믿고, 항상 긍정적 언어로 밀어주고, 부족한 남편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학교를 선택하는 과정에는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다. 한국동란 직후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한 어머니는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미국 뉴저지 시튼홀대학에서 ‘아시아 역사학’을 가르치셨다. 이런 어머니의 추천이 있어 난 간단한 영어 시험과 인터뷰를 거쳐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부에 손을 놓은 지 10여년이 지났고 영어 실력은 사업을 하느라 익힌 기초회화 정도가 다였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사실 난 학사 자격이 있고 경영학석사(MBA)를 마쳐 미국 대학원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졸업장만 따는 형식적인 공부는 의미가 없고 미국까지 힘들게 갈 필요가 없었다. 정말 실력을 쌓고 바른 학문적 성취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엉뚱하게도 미국 고등학교부터 다녀보고 싶은 생각에 미국 도착 직후 고등학교도 찾아갔었다. 그런데 내 나이를 물어보더니 너무 많아 안 된다고 거절을 당했다. 교무실을 나오는데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마흔이 된 친구가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나는 창피함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내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욕이 강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내 몫으로 가져가야 하는 부분에 너무 형식과 체면에 치우쳐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곤 한다. 겉이 화려하다고 속이 반드시 알찬 것은 아니다. 겉이 보잘것없어도 속이 알차면 이것이 더 귀한 것으로 대접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나는 이것을 학문세계에 들어와 너무나 절절히 체험했다. 결국 실력 있는 자가 인생에서 대우받고 승리하게 된다. 내면을 가꾸고 나를 세워가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더라도 껍데기만 가진 형식적인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면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 아닐 수 없다.
시튼홀대학은 170년 전통의 가톨릭 학교였다. 이곳 뉴저지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푸른 나무가 특히 많아 정원도시라고도 불린다. 뉴욕 바로 옆이라 교통도 편했다. 뉴욕 팬스테이트역에서 열차를 타면 학교가 있는 사우스오렌지역에 30분이면 도착했다.
난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급우들 중에 경산, 밀양 등 시골에서 기차 통학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가끔 그들 집에 놀러 가면 그 전원적인 풍경에 매료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사우스오렌지가 전형적인 시골풍 전원도시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미국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조그마하고 아름다운 사우스오렌지는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난쟁이들 동네’가 연상된다. 봄이면 각양각색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녹음이 짙어간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각색의 단풍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멋진 설경을 선사했다. 사계절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는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겐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