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벌고 영어도 배우겠다고?… 야무진 꿈 깨세요”

입력 2013-12-11 01:34 수정 2013-12-11 14:54


부푼 마음으로 호주 간 ‘워홀러’들의 슬픈 현실

지난달 24일 ‘워킹 홀리데이(워홀)’ 비자를 받아 호주에 간 20대 한국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높은 취업문에 부닥친 젊은이들이 돈을 벌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타국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호주로 향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범죄에 노출돼 있을 뿐 아니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은 워킹(working·일)과 홀리데이(holiday·휴가)가 합쳐진 ‘일하는 휴가’가 아니라 ‘킬링 홀리데이(죽음의 휴가)’ ‘워킹 호러데이(공포스럽게 일하는 날)’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슬픈 호주 워홀러 이야기=대학생 박모(24)씨는 워홀 비자를 받고 2011년 8월 호주 멜버른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른 워홀러들과 마찬가지로 ‘돈, 영어, 경험’이 목적이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집을 구한 뒤 일자리부터 찾기 시작했다. 2주 동안 제출한 이력서가 100통이 넘는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박씨는 카페에서 일하길 원했지만 능숙지 않은 영어가 걸림돌이 됐다.

결국 한국인이 운영하는 청소대행 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벽 6시부터 3시간 정도는 대형 문구용품점에서, 오후 4∼8시에는 근처 학교의 교실 40곳 정도를 청소했다. 그렇게 일하면 시급으로 최저임금에 조금 못 미치는 15달러(약 1만5800원)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나마 박씨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통상 워홀러들의 시급은 10∼13달러 수준에서 정해진다. 청소기를 하루 7시간 이상 붙들고 있다 보니 손가락을 굽히면 통증이 느껴지는 병이 생겨 약을 챙겨먹어야 했다.

몇 달 뒤 레바논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시급은 12달러로 줄었지만 서빙을 하다 보면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러나 박씨에게 주어진 일은 100개가 넘는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는 것이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워홀을 통해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작 접었다. 박씨는 “호주에서 일하며 영어 실력을 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왜 호주로 몰리나=워홀은 외국여행을 하며 합법적으로 취업해 돈을 벌 수 있도록 국가 간 협정을 맺는 제도다. 만 18∼30세를 대상으로 한 나라에 1회씩만 워홀 비자를 받을 수 있으며 최대 1년까지 있을 수 있다. 호주는 땅은 넓지만 인구가 적어 워홀러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해 농장에서 일할 저렴한 노동력도 많이 필요하다.

호주 관광청은 지난 3월 ‘6개월간 1억원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직업 프로그램’이라며 워홀을 홍보했다. 세계 28개국과 워홀 협약을 체결해 한 해 25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호주의 워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호주 이민부가 발표한 ‘2012∼2013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계연도 기간에 워홀 비자로 호주를 찾은 외국인은 25만8248명으로 집계됐다. 전회계연도보다 15.8% 증가한 수치다. 영국인이 4만6131명으로 가장 많았고, 대만이 3만5761명으로 뒤를 이었다. 대만은 전년도보다 무려 59.7% 늘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워홀 비자를 들고 호주로 몰려들다 보니 일자리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워홀러들도 호주를 선호한다. 한국은 현재 뉴질랜드 대만 덴마크 독일 스웨덴 아일랜드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 체코 캐나다 프랑스 홍콩 헝가리 이스라엘 호주 등 17개 국가·지역과 워홀 협정을 맺고 있다. 이 중 호주로 워홀을 떠난 국내 젊은이는 4만8496명 중 3만4234명(70.6%)으로 압도적이다. 워홀러들이 두 번째로 많이 찾는 일본(5856명)보다 6배 가까이 많다. 2008∼2011년에도 3만∼3만9500명이 호주를 찾았다. 호주 참가자 수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다른 영어권 국가는 연간 쿼터제가 있는 반면에 호주는 참가자 수 제한이 없어 신청만 하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일자리 경쟁과 범죄 노출=일자리를 찾아 호주까지 갔지만 막상 그곳도 상황은 비슷하다. 유럽 경기가 극심한 침체에 빠진 뒤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청년실업률이 30∼50%까지 치솟자 유럽의 젊은이들까지 호주로 몰렸다. 호주를 찾은 한국인 워홀러들은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나기 일쑤다. 호주 업자들도 이왕이면 영어 잘하는 젊은이를 고용하기 때문이다. 호주 워홀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대학생 이모(25·여)씨는 “많은 한국인이 유럽에서 온 청년들과의 구직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한국인 워홀러들이 저임금 단순 노동직으로 쏠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워홀러들이 워낙 많다 보니 싸게 부려먹어도 된다는 인식마저 퍼져 있다고 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워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으로 내몰리게 된다. 접시닦이나 새벽 청소, 농장 잡역부 등 밑바닥에서 일하며 최저임금보다 낮은 헐값에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 노동일을 하게 될 경우 영어 공부는 물 건너간 것이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구직 대행업체 수수료와 숙박비, 교통비 등을 떼고 나면 남는 건 거의 없다. 성매매 업소로 흘러가는 여성들도 있다고 한다. 올 초 성매매로 돈을 벌던 여성 워홀러가 절도 혐의로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지인들은 이들을 ‘취업 난민자’라고 부른다.

워홀러에 대한 현지인들의 거부감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워홀러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인종에 대한 호주인들의 반감은 위험요소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발생한 ‘호주 여대생 살인사건’을 수사 중인 호주 경찰은 용의자가 유색 인종에 대한 증오로 한국인 워홀러 여대생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7월 호주에서 돌아온 한 워홀러는 “호주에서 동양 남자는 집 안에서 기르는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범죄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워홀러들이 외국에서 당한 범죄(강도·폭행·사기) 사건은 108건이다. 그중 99건이 호주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12월엔 한국인 유학생이나 워홀 참가자의 폭행 사건이 잇따르자 호주 외교부 장관이 유감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특히 워홀러들은 현지 유학생들에 비해 돈이 부족해 거처가 불안정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각종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손 놓은 정부, 대책은 없나=워홀러들의 피해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 만큼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범죄 노출이나 노동착취 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정부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2011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핵심 과제로 워홀을 선정하기도 했지만 현재 워홀러들의 신변안전에 대한 제도적 장치는 전무한 상태다. 이를 위해 현지 영사관을 중심으로 워홀에 참가 중인 국내 젊은이들의 실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언제 와서, 어디에 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워홀러들도 ‘무작정 떠나고 보자’는 식으로 국내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언어 능력을 갖춰야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범죄에 대처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본 어학 능력 등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두자는 주장도 나온다. 외교부 관계자는 “출발 전 외교부에서 운영하는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 등을 통해 현지 일자리와 거주지에 대한 인식과 준비가 우선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