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정한 (6) 美 유학전 골방서 두 달간 동양화 100여편 습작

입력 2013-12-11 02:32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아내의 승낙을 받은 뒤 사실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것은 “과연 내가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까?”란 질문이었다.

먼저 화가로서 재능을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꼬박 2달 동안 골방에 박혀 손놓았던 그림을 그렸다. 선배들에게 어설프게 배운 기억을 살려 100여장의 동양화를 그린 것이다. 유화는 물감 값도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중국화와 한국화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삽입시켜 한지에 그리고 또 그렸다. 어설픈 작품들이지만 이 작품으로 전시회를 한 번 열고 미국으로 떠났으면 했다. 이곳저곳 갤러리를 노크했지만 모두 퇴짜였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다니던 소공동 롯데백화점 내 갤러리에 직접 전화해 주었다. 갤러리 원장은 나의 이력서와 그림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내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무명인 나를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미팅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이름난 화가도 아니고 더구나 미술을 전공하거나 공부도 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이렇게 조마조마하던 내게 오히려 아내가 용기를 주었다. “여보 우리 기도해요.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시니 도와주실 겁니다.”

아내의 이 말은 내게 여간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학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시회까지 열도록 돕는 아내의 깊은 마음에 비하면 난 그저 철부지였다. 면담 날, 아내는 출근하기 전 아파트 문 앞에서 내 손을 꼭 잡고 힘있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 남편을 앞으로 크게 사용해 주시고 믿음의 남편으로 바꾸어 주세요!”

나는 “혹시 이웃 중에 이 기도소리를 들으면 창피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심했고 신앙도 부족했다. 그런데 이날

나는 아내와 손잡고 기도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넘어 뜨겁고 강한 그 무엇이 기도 속에서 느껴졌다. 나는 이력서와 그동안 그린 그림 원본을 몇 장 가지고 갤러리 원장을 만났다. 자료를 보는 원장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니 화가로 경험도 없으시고 수상경력이나 특별한 이력이 전혀 없군요.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롯데갤러리는 1∼2년 전에 예약이 다 돼 있고 더구나 신인작가들은 받지 않습니다.” 전시 일정표를 직접 보여 주는데 빽빽한 일정에 유명 화가들 이름이 쉽게 눈에 띄었다. 

“제가 4월이면 미국 유학을 갑니다. 그림 공부하러 가는데 경력을 쌓을 겸 어떻게 기회를 한번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내 입장이었다. 단번에 거절을 당하고 집으로 온 나는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전시회가 가능하게 해주세요. 제겐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 기도가 그대로 응답됐다. 아는 인맥을 통해 딱 일주일 비어 있던 그 시기를 내가 차고 들어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롯데갤러리는 미술인들이라면 누구나 전시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곳이었다.

1996년 2월 중순, 70여 점의 그림을 걸고 롯데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 오픈식엔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격려해 주었다. 모두들 놀라면서 “언제 이렇게 그림을 그렸느냐”고 했다. 내게 예술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전시회 인사시간에 이렇게 선언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반드시 한국에 돌아와 선진 한국교육의 장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배운 모든 것,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인사말을 했지만 내 말을 믿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학교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미국 가서 6개월 어학연수만이라도 잘 마치면 일단 성공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잘 하고 오세요.” 그동안 난 술 잘 마시고 놀기만 좋아했으니 무리가 아니었다. 은근히 오기가 솟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