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학기도 다 끝나가는데 주문한 점자책은 무소식… ‘속수무冊’ 시각장애 대학생들 “속타네”

입력 2013-12-10 01:46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시각장애인 대학생들은 누구보다 애가 탄다. 활자를 읽을 수 없는 이들은 대학 교재를 전자점자파일이나 점자도서 등으로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다니는 시각장애인 이명근(29)씨도 올해 내내 교재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학기 초 강의계획표가 나오면 대다수 비장애인 학생들은 수강신청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인 이씨의 마음고생은 수강신청에 성공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교재를 구하기 위한 2∼3개월의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학생은 국립장애인도서관, 사회복지관, 학교 내 장애학생지원센터에 ‘대체 자료’ 제작을 신청할 수 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은 양질의 자료를 제공하는 대신 가장 느리다. 빨라야 중간고사 직전, 늦을 때는 학기가 다 끝나서야 책이 도착해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 번에 2000페이지밖에 신청할 수 없어 복지관 여러 곳과 학교에 적절히 나눠 신청하는 요령을 터득해야 한다. 학교별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일주일 안에 도서를 받아볼 정도로 속도는 빠르지만 시험을 준비하기에는 점자 도서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이씨에게 올 2학기 필요했던 책은 ‘충동과 자기관리’ ‘한국정치론 1·2’ ‘비교 정치’ 등 총 4권. 속도가 느린 국립중앙도서관은 아예 포기하고 학교와 복지관에만 교재를 신청했다. 4권 중 첫 번째 책을 손에 넣는 데 3주가 걸렸다. 나머지 3권은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둔 10월 셋째 주부터 하나씩 도착했다. 이씨는 “그래도 중간고사 전에 책이 도착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교재가 없으니 학기 내내 이어지는 수업도 괴롭다. 유인물을 많이 활용하는 강의는 그나마 낫지만 교재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은 따라가기도 벅차다. 친구들에게 교재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받아 적으며 공부하지만 고역이다.

그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잠시도 딴생각을 할 틈이 없다”며 “(다른 시각장애인) 친구 책을 빌리려 해도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의 공부시간을 빼앗는 꼴이 돼 난처하다”고 말했다. 이런 불편함과 난처함은 그에겐 일상이다. 그는 “처음엔 내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지 화가 났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5월 기준으로 시각장애인 1380명이 전국 420개 대학(전문대 포함)·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그러나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설치된 대학은 255곳뿐이다. 국립장애인도서관 관계자는 “학기 초 대학생들의 제작 신청이 크게 늘지만 인력과 기타 여건상 항상 제작이 밀려 있다”고 전했다.

시각장애인인 대구대 직업재활학과 조성재 교수는 “2011년 국립장애인도서관에 통계 관련 서적의 점자본 제작을 의뢰했는데 책을 받는 데 1년이나 걸렸다”며 “내가 대학 다니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각장애 학생 대다수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한국점자도서관 육근해 관장은 “시각장애인 정보접근권 확보 문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