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5주년 사설] 우리에겐 남다른 의욕과 열정이 있다

입력 2013-12-10 01:35

정치인은 적을 동지로 만드는 기술 배워라

국운이 기울었던 조선 말기에 맞먹는 위기라는 진단들이 한창이다. 한때 잘나가는 줄 알았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언제부터인가 위기라고 수런거리는 것을 보면서 분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렇다. 그 분함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우리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금세기 최대의 양자관계인 미국·중국 문제를 둘러싼 파고가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고 여기에 한·일 관계와 북핵 문제가 겹쳐 한반도는 지금 시계(視界) 제로 상태다. 한국의 호흡을 곤란하게 하는 중국 발 미세먼지나 한·중·일 3국이 서로 자국의 식별구역이라고 선을 그은 이어도 상공은 오늘날 한반도의 어려운 상황을 말하는 시대적 메타포다.

최근 중국의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 확대 선포를 통해 국민들은 우리의 영해가 일본 및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 포함돼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제야 정부는 홍도와 마라도와 이어도를 포함시키는 한국방공식별구역을 선포했다.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 문제는 구역의 중첩뿐 아니라 중·일 간 센카쿠 분쟁, 역내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기 싸움과 맞물리면서 동북아 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그 복잡한 가운데 군사력을 포함한 우리의 총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잠들어 있던 대륙과 바다와 영공에 대한 우리의 꿈은 동북아 파고 속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고 있지만, 너무 늦었고 미약하기만 하다.

한·미는 흔들릴 수 없는 혈맹관계다. 오늘의 한국은 한·미동맹의 신뢰와 안정을 발판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동북아의 파고는 한·미 관계에 있어서도 녹록지 않은 부담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MD) 체제의 참여 요청 같은 것이 그 한 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자 남북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핵심 당사국이다. 안보 이익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살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정부에서 소원했던 중국과의 관계 복원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미국도 만족시키고 중국도 만족시킬 만한 신수(神秀)의 카드가 웬만하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근자에 더없이 악화돼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비롯해 자국의 군사 역할 강화와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을 본격화하면서 새로운 불씨를 지피고 있다. 미국의 일본 지지는 침탈의 역사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의 폭주를 부추기고 있다.

한국경제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고 기업 및 가계 부채는 큰 걸림돌이다. 부채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는 내수회복 모멘텀이 약세를 보여 한국경제는 수출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고, 해외 변수에 따라 국내 경제의 앞날이 요동칠 우려는 상존한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한국 국민들은 전에 없이 작고 부족하다는 결핍의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요동치면서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먼저 우리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제일 못하는 것이 정치이고 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편파와 갈등의 문제다. 우리는 진영싸움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확산시키는 나쁜 습관을 갖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교육열과 성취도가 뛰어나고 어느 분야에서든지 할 수 있다는 에너지가 분출한다. 한류바람은 산업 전 분야로 확산돼 지구촌에 한국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이런 질문 앞에 마주해야 한다. 우리의 소모적 정치와 이념적 전쟁 상태를 극복하고 오늘의 결핍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이 “예스”라면 우리는 어렵더라도 내일의 창창함에 도전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의 최고 골칫덩어리인 북한은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 십 수년째 수백만의 주민을 희생시킨 북한은 무엇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가. 어느 누가 행복해지겠다고 불바다 타령을 일삼는가. 북핵 위협은 이제 지구촌에 가공할 만한 위협이 되지 못한다. 자유도 식량도 없는 북한에서 지금 광범위한 가족 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팩트가 아닌가. 북한은 남북한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해 인지상정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 화해의 초석은 사랑의 정신을 공유한 교회에서 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남북은 불확실한 관계 속에 있지만 그래도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믿을 수 있다. 북한 교회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남과 북의 교회는 그동안 많은 교류를 통해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나눴다. 이것은 정치적 대립을 뛰어넘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런 경험을 축적한 남과 북의 교회는 ‘우리는 사랑의 형제’라는 인식을 갖고 서로의 공통점을 찾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이런 움직임이 추동력이 돼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을 이뤄야 하고, 한국의 정치인들은 주변국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각국 지도자들과 우정을 나누며 그것을 한반도 정책에 활용해야 한다. 통일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는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나 러시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수준 높은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친구 사이였고, 헬무트 콜 총리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마음이 척척 통하는 사이였다. 빌리 브란트와 함께 동방정책을 설계한 사민당 소속 특임부 장관 에곤 바르와 미국 헨리 키신저는 이심전심 하는 최고 수준의 외교 책략가들이었다. 이 모든 관계들이 훌륭한 시스템으로 작용하면서 독일을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두 번이나 남북 정상회담을 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지금 누가 북한의 김정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인가. 누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워싱턴 조야에 널리 통하는 지성이며, 중국 시진핑 주석과 격의 없이 지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 아베 일본 총리의 절친은 누구인가. 넬슨 만델라 같은 인적 자원 하나가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말발을 세우는지를 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 그런 인재와 맥락이 없다면 적을 동지로 바꾸는 기술이 크게 부족한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화합하는 기술부터 배워야 한다. 먼저 대통령은 집무실에 야당 대표 사진을 걸어 놓고, 야당 대표는 대통령 사진을 거는 도량을 익혀야 한다. 한국은 독일처럼 돈으로 통일의 길을 닦을 수도 없고, 국제사회에서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도 모자란다. 일본과 같은 기술력을 갖지 못했고,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자원도 없다.

있다면 넘치는 열정과 그 실현을 향한 남다른 의욕 같은 것이 있다. 이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꿈을 구체화해야 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동체적 의식, 협상의 기술과 국제적 연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저 어리석은 남북 정상회담 문서 까발리기는 우리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에 얼마나 후진적인 정치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국민일보가 창간 25주년 슬로건으로 ‘착한 사회, 착한 교회, 착한 신문’을 주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착하다’는 것은 편하면서도 쉽고 친근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 이 착하게 하나 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성경에는 굿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끝이 창대하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무엇보다 이런 가치가 확산돼야 하고, 이 착하고 선한 기운이 각계의 전 영역에 골고루 스며들어 자부자강(自富自强)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