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관조하는 사유·철학, 사진에 담다
입력 2013-12-10 01:34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사진은 더 이상 풍경의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사유와 철학의 개념이 작품에 도입된 건 오래전이다.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것이다. 숱하게 열리고 있는 사진전 가운데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일본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65)와 사간동 갤러리현대의 한국 사진작가 이명호(38) 개인전은 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히로시는 ‘사유하는 사진’이라는 타이틀로 사진·조각설치·영상 등 49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번개 치는 들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광활한 대지에 번개가 내리 꽂는 듯한 이 작품은 실제 번개를 촬영한 것이 아니다. 40만 볼트의 전기를 금속판에 맞대는, 위험천만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인공 번개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하늘로 뿌리를 올린 원시림의 나무처럼 보인다.
뿌연 하늘과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제주도 해안 등을 촬영한 ‘바다풍경’은 대체 하루 중 언제인지, 최근의 바다인지, 수십 년 전의 바다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극장’은 미국의 근·현대 시네마 홀과 자동차극장을 오랫동안 노출기법으로 찍은 작품이다. 이런 사진을 통해 시간의 흐름, 사유의 시공간, 생명 탄생의 기원 등을 보여준다.
199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를 열고 2001년 사진계의 노벨상인 ‘핫셀블라드상’을 수상한 작가는 일본 전통연극을 연출하고 무대의상을 디자인한 데 이어 건축의 개념으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시 개막에 맞춰 방한한 그는 “건축가라는 심정으로 리움 공간을 재설계하듯이 전시를 꾸몄는데 완성된 전시장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내년 3월 23일까지(02-2014-6900).
이명호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는 나무 뒤에 하얀 천을 설치한 다음 사진을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나무만 있으면 그냥 평범한 자연물이지만 하얀 천이 캔버스 역할을 해 회화와 사진이 결합된 작품이 된다.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이 작업은 중앙대 사진학과에 다니던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꿈은 어둠 속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희망의 불빛을 전하는 등대지기였다.
하지만 등대가 점차 기계화되는 추세 속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대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예술’이나 ‘작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캔버스에 뭔가를 그려 넣으려고 고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캔버스에 인위적으로 채워 넣는 대신 자연이 캔버스를 채우게 할 수는 없을까.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 뒤에 캔버스를 놓았더니 작품이 됐다.
‘사진-행위 프로젝트: 밝은 방, 어두운 방…’이라는 타이틀의 전시에서는 조명을 밝게 한 1층에 ‘나무’ 연작을, 어둡게 꾸민 2층에는 사막 풍경을 담은 ‘바다’ 연작을 선보인다. 나무 뒤의 하얀 천이 생명의 신기루라면 사막에 펼친 하얀 천은 오아시스처럼 보인다. 작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이 작업과 등대의 역할은 같다”고 말했다. 12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02-2287-3575).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