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회 만들기 이렇게] 한 지붕 아홉 이웃 가족같이 오손도손… “삶이 즐거워요”

입력 2013-12-10 01:34


성미산마을 ‘소행주’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

부모 학대로 죽어간 어린 영혼, 자식에게 맞아 숨진 부모, 주정뱅이 남편을 살해한 주부…. 신문 사회면에 보도되는 처참한 사건 옆에는 방관하는 이웃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혹은 눈앞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남의 일’로 치부하는 사회는 착한 공동체와 가장 거리가 먼 모습일 것이다. 국민일보는 착한 이웃이 꾸려가고 있는 작은 공동체를 찾아갔다. 희망은 늘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에 있었다.

딸 셋을 키우는 한진숙(42·여)씨는 언제나 편한 마음으로 외출한다. 딸 키우기 겁나는 세상이라지만 그는 아이들만 집에 두고 과감히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급한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알아서 윗집, 아랫집, 앞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한씨가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성산동 성미산마을의 셰어하우스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소행주)에 정착한 건 이 때문이다. 셰어하우스는 한 주택에 여러 가족이 살면서 침실 같은 사적 공간만 빼고 주방·거실 등을 함께 쓰는 방식의 주거 형태다. 6층 건물에 9가구 39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한씨는 “좋은 동네, 좋은 집보다 좋은 이웃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다함께 풍족한 소행주의 저녁

지난달 29일 오후 찾아간 소행주는 공동 공간인 ‘씨실’에서 ‘저녁 해방 모임’이 한창이었다. 씨실은 커뮤니티(Community)의 ‘C’에 한자 ‘방(室)’을 더해 만든 이름이다. 가족이 모여 저녁 먹는 자리에 거창하게 ‘해방’이란 단어가 붙은 건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을 고용하기 때문이다. 저녁 준비에서 주부들을 해방시켜준다는 뜻. 각 가정이 조금씩 돈을 모으기에 가능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는 오후 4시30분쯤 이곳에 와서 주부들이 사둔 재료로 15인분 저녁을 차린다.

식사 준비가 끝나가던 오후 6시, 한씨가 방금 담근 김장김치를 들고 씨실을 찾았다. 10분쯤 뒤에는 잘 구운 조기와 메추리알 장조림을 두 손 가득 들고 박미현(49·여)씨가 나타났다. 박씨가 오리란 건 이미 소행주 카카오톡 채팅방을 통해 알려져 있었다. 얼마 후 5명이 씨실로 와서 조기와 메추리알을 한 봉지씩 받아갔다. 오후 7시를 넘기자 김우(43·여)씨가 맥주 3병을 들고 왔다. 즉석 맥주 파티가 벌어졌고 하루일과를 안주로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이웃끼리 무언가 나누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회의 안건은 여행과 크리스마스 파티

오후 8시가 되자 씨실에 12명이 모여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입주자 회의가 시작됐다. 고구마튀김, 빵, 김치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놓고 1시간 이상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연말에 함께 떠나기로 한 온천여행과 아이들 크리스마스 이벤트였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지, 여행 가서 무엇을 할지 등 도란도란 얘기하는 자리에선 이웃 간 돈독한 신뢰와 정이 묻어났다. 다툼으로 번지기 쉬운 층간소음 따위는 이곳에선 ‘무조건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사생활 침해도 별로 걱정할 게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가족만의 공간은 보통의 주거처럼 구분돼 있다. 가정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철문은 이곳이 사적인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문 앞 복도나 계단부터는 빌라 아파트 등 공동주택과 차이가 있다. 소행주 사람들은 1층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자기 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선지 계단과 복도는 맨발로도 다닐 수 있을 만큼 깔끔하게 청소돼 있었다. 또 방안에 두면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큰 짐이나 빨래 건조대를 이곳에 두는 식으로 넓지 않은 개인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아이들의 추억 만드는 실내 캠핑장

어른들이 돌아가고 밤이 되자 씨실은 아이들의 캠핑장으로 변했다. 이곳 아이들은 프로젝터로 영화도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다 하나둘씩 잠들었다. 씨실에선 이곳 아이들의 동네·학교 친구들도 찾아와 추억을 만들어 간다. 변정희(37·여)씨는 “소행주가 동네 사람들도 함께 이용하는 공간으로까지 활용될 줄은 몰랐다”며 “거주자뿐 아니라 성미산마을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돼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앞서 저녁식사 전에는 이곳에 사는 초등학교 1∼3학년 아이들의 딱지치기 판이 벌어졌다. 추워서 밖에 나가기 어려운 날에도 씨실은 훌륭한 놀이터였다.

서울 영등포구 빌라에서 살다 이곳에 입주한 윤상석(36)씨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예전 집의 절반 크기에 불과하지만 삶은 훨씬 윤택해졌다”며 “착한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을 돈으로 사려면 아마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요진 기자 tru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