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 독일을 말하다] “獨 정권 바뀌어도 정책 계승·발전… 동방정책 대표적”
입력 2013-12-10 01:55
만난 사람=김의구 부국장
김황식(65) 전 국무총리는 독일의 통일 과정에 초점을 두고 많은 설명을 했다. 이명박정부 마지막 총리를 역임하고 퇴임 이후 6개월 동안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수를 마친 뒤 지난달 1일 귀국했다. 김 전 총리를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났다.
김 전 총리는 독일 체류 기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동독의 마지막 총리였던 로타르 드 메지에르와 나눈 대화를 꼽았을 만큼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독일 연수 과정에서도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일 교수들을 자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여야의 대치정국, 경제성장, 사회갈등 등 다른 국내 문제들에 대해서도 독일의 사례를 적용해 해법을 조언했다. 특히 현행 대통령제에 대해 “현 체제가 가장 좋은 체제라는 것은 입증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권력이 철저하게 분립된 독일의 권력구조를 대안으로 소개했다.
-베를린자유대학에서의 연수 내용은.
“대학에 적을 두고 연구실을 제공받아서 독일 관련 각종 자료들과 책을 찾아서 읽고, 사람들과 만나서 토론하고, 대학생과 경제단체·교회 계통의 포럼에서 특강도 하면서 지냈다. 자유대학의 교수들,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은 교수들을 만나서 대화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 드 메지에르는 물론 북한 관계 전문 학자들을 만나 통일과 관련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독일은 이미 통일을 달성했는데 남북통일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외국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많이 하려는 것이 독일의 정책방향이다. 특히 한국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통일 경험을 통해 관심을 갖고 지원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은 독일의 경험을 잘 활용하는 게 도움이 되므로 양측의 이해가 잘 맞는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이 배울 점이 있다면.
“우선 동독과 서독 간에는 내전이 없어 어느 정도 상호간에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서독이 베를린 장벽에 설치된 자동 소총을 철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경제 지원을 하면 동독은 약속을 이행했다. 또 서독이 환경문제 개선을 위한 지원을 하면 동독은 그 돈을 반드시 해당 분야에 사용했다. 하지만 남북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관계 발전에 장애가 있다.”
-독일의 통일 정책인 동방정책(Ostpolitik)은 우리로 치면 햇볕정책이다. 독일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이 계승됐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유는 뭔가.
“독일 정치의 장점이자 특색이 진화의 정치다. 정권이 재창출되든지 교체되든지 간에 전 정권의 정책을 깡그리 무시하는 법이 없다. 대신 계승·발전, 조정·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독일도 1950∼1960년대 아데나워 총리일 때는 힘 우위의 정책이었다. ‘서독이 서방의 일원으로 남아야 한다’ ‘경제 부흥부터 이뤄야 한다’ 등 힘을 가질 때 평화를 지키고 통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도 아데나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0년 사회민주당 출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처음에는 서독 국민들의 강한 저항을 겪었다. 통일의 초석을 놓기 위해 폴란드 국경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독일 국민들은 2차대전 이후 폴란드에 넘어간 독일 영토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힘을 받았다. 브란트 총리가 비서실에 동독의 간첩이 있었다는 문제 때문에 사임했지만, 나중에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가 동방정책을 계승·발전시켜서 통일을 이뤘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북관계의 특성이 동족상잔을 겪었고, 북한의 특수한 세습체계, 핵무기 개발 등의 문제 때문에 포용정책이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햇볕정책은 우리 국민으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노력이었다고 본다.”
-독일은 최근 여당과 제1야당이 대(大)연정을 했다. 우리 입장에선 가능하지 않을 일인데.
“독일은 대연정을 1966년, 2002년에 이어 세 번째로 했다. 이는 독일의 독특한 정치 문화다. 가능한 이유는 기독교민주당과 사민당 사이 정책의 차이가 많이 희석된 상태여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절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절충은 국민 통합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독일의 힘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좌파가 이겨서 여소야대가 됐다. 야권의 세 정당이 합쳐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원칙에 어긋나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일식 품격의 정치다.”
-독일은 권력이 분점돼 있다. 우리나라도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나오는데 어떤 체제가 적합하다고 보나.
“대통령제·의원내각제·이원집정부제, 헌법학적으로 크게 3개 체제가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 다만 권력 집중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서 권력이 분배되고, 분배된 권력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절충해 나가는 그런 정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 확고한 생각이다. 그 모델 중 하나가 독일이다. 독일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여야가 연정을 꾸리도록 요구한다. 곳곳에 권한을 분배시켜 놓아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내는 체제다. (독일과 같은) 의원내각제가 빠르고 힘 있는 의사결정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집중에 따른 폐해가 더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 통합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된다.”
-독일 경제는 글로벌 위기 상항에서도 꿋꿋하고 튼실하다. 원동력은 무엇인가.
“2003∼2005년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내건 ‘아젠다 2010’의 과실을 이제 거두는 것이라고 본다.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고, 복지를 줄이는 우파적인 개혁 정책인 아젠다 2010을 기민당의 메르켈정부도 승계했다. 정치가들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개혁 정책을 소신 있게 추진했던 결과가 오늘날의 번영이다.”
-독일과 일본이 다 2차대전 전범국이면서도 가는 길이 다른데.
“1985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종전 40주년을 기념해서 하원에서 한 연설이 있다. ‘독일이 패망했는데 패전 기념일이 아니다, 해방의 날이다. 나치로부터 해방되고 잘못된 역사로부터 우리 민족이 빠져나온 해방의 날이다’고 했다. 감동적인 연설로 국민들에게 확실한 역사인식을 심어줬다. 그런데 어떤 일본 정치인이 1945년을 ‘일본이 해방된 날’이라고 연설할 수 있겠나?(웃음)”
-독일은 복잡한 사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나.
“독일의 노하우 중 중요한 것이 사회의 연대성이다. 나 중심, 내 가족 중심이 아니라 ‘전체가 더불어 산다’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로 정착돼 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화하고 협의해서 ‘제3의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 있다.”
-국민일보가 1년 동안 진행한 ‘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시리즈를 어떻게 평가하나.
“독일에 가기 전에도 봤고 독일에서는 인터넷으로 읽었다. 큰일을 했고, 바르고 따뜻한 나라를 만드는 데 중요한 자료들을 발굴해 소개했다. 나도 독일 체류 중 페이스북에 독일 문제를 자주 올렸다. 국가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사에서 그런 노력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관심이 집중된 서울시장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공인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없다”며 “선출직 출마를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을 아꼈다.
-공직생활 40년에 총리로 2년5개월간 행정각부를 통할한 경험이 있다. 우리 사회를 위해 더 봉사할 어떤 구상을 갖고 있나.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다. 대학의 젊은이 등에게 강연을 하면서 소박하게 만년을 보내고 싶다.”
-여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데.
“제안이 오면 그때 가서 내 의견을 말하면 되지 미래의 일을 미리 판단해서 확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고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준 분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선출직은 꺼려진다. 하지만 구체적인 제안이 없는 상황에서 ‘한다, 안 한다’고 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귀국 후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났나.
“한 번 만났다. 운동을 하시는 것 같고, 회고록을 준비하는 것 같다.”
정리=유동근 기자 dk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