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역사 치유의 현장 (1)] 관동대학살 90년, 고통의 현장에 서다(상)

입력 2013-12-10 01:31 수정 2013-12-10 13:11


韓·日민초들 손잡고 ‘관동비극’ 진실의 문 연다

20세기 대한민국은 망국에서 건국으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최빈국에서 사상 최대의 풍요를 누리는 극적인 역사를 건너왔다. 어지러운 역사는 겉으로 드러난 영광과 함께 한국인의 영혼에 깊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공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본보 취재진이 창간 25주년을 맞아 갈라진 역사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내·외 현장을 찾아간다.

◇두 개의 추모비가 건네는 질문=일본 지바현 후나바시의 마고메 공동묘지. 입구에서 300m 정도 걸어가면 ‘관동대지진 희생동포 위령비’가 서 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재일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추모비다.

‘당시 야마모토 군벌 내각은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공모하여 폭동을 계획 중이라는 근거 없는 말로…우리 동포를 학살했다.’

1947년 3월 재일본조선인연맹이 건립한 추모비에는 학살 주체가 일본 정부였다고 밝히고 있다. 추모비에서 왼쪽으로 세 걸음만 옮기면 또 다른 추모비가 보인다. 한자로 ‘法戒無緣搭(법계무연탑)’이라고 쓰였다. 관동대지진 사흘 후인 1923년 9월 4일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이 경찰서로 연행 중이던 조선인을 살해했는데, 이듬해 9월 후나바시 불교연합회가 세운 추모비다. 하지만 추모비 어느 면에도 희생자가 조선인이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달 25일 기자가 이곳에서 찾은 빛바랜 두 개의 추모비는 관동대학살 90주기를 맞이하는 한국과 일본의 현 주소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울부짖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두 추모비 사이에서 아른거렸다. 매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이면 이 곳 추모비 앞에서는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가 열린다. 같은 시각 일본 전역에서는 긴 사이렌과 함께 ‘방재의 날’ 재난대피훈련이 이뤄진다.

관동대학살의 비극으로 갈라진 두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가해자와 피해자는 함께 공존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은폐된 역사, 피어나는 진실의 꽃= 다음날 도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의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을 찾았다. ‘관동대지진 90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조선인은 또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백리까지 이어지고… 이게 무슨 참상인가.’

조선인 학살현장을 목격한 일본 시인이 남긴 ‘근일소감’이란 시가 걸려 있었다. 또다른 일본인은 목이 잘린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현장을 찍은 사진을 자료관에 공개했다. 사진 한켠에는 손으로 ‘鮮人(선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속 사람이 조선인이란 뜻이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이미애 학예관은 “이 곳의 전시물은 모두 일본인들이 기증하거나 개인 자서전에 남긴 자료들”이라며 “자료관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교과서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내용’이라며 충격을 금치 못한다”고 설명했다.

한쪽 벽면에는 당시 국민학생(현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 수십 점이 전시돼 있었다. 한국인이 자경단에게 검문을 당하고, 몽둥이로 구타 당하다 칼에 찔려 피 흘리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학살 사실 자체를 숨겨왔지만, 현장을 본 일본인들은 줄기차게 증언해온 것이다. 진실의 꽃은 이미 현장에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관동대학살 알리기’…한·일 민초의 힘= 니시자키 마사오(54)씨는 도쿄 스미다구 아라카와 제방 인근의 주택가에 산다. 관동대지진 당시 이 제방 너머에서 자경단이 조선인 10여명을 살해하고 묻었다. 영어교사가 되려고 했던 니시자키씨는 대학 4학년때 이 사실을 알게되면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어릴 적 내가 놀던 강가에서 그런 비극이 있었다는 게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50㏄짜리 오토바이를 타고 도쿄 일대 23개 구의 공립도서관 100여 곳을 이 잡듯 뒤졌다. 일기와 개인 자서전 등 관동대지진 당시 자료를 찾고 증언을 수집, 학살 장소와 실태를 밝혀내 ‘학살 지도’까지 그려냈다. 그는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추모하는 모임인 ‘봉선화’를 조직하고 자택 옆 빈 공간에 희생자 추모비까지 만들었다.

“가해자 입장에서 본다면 불리한 건 숨기고 싶은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용서와 화해는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일 한국인이 5세까지 나온 상황에서 이제는 일본 정부가 엄연한 역사의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 아닌가요.”

일본에 ‘봉선화’ 같은 모임이 있다면 한국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가 있다. 7년여 전부터 교회와 기독시민단체, 목사, 기독 청년 등 기독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관동대학살 진상규명 시민단체다. 국가 차원의 조사와 특별법 제정 촉구, 한·일 심포지엄과 세미나 같은 학술 행사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단체 한국상임대표 김종수 목사의 활동 목표와 방향은 명확하다.

“한·일간 역사적 화해를 통해 공존하고 상생하자는 거죠. 하지만 역사적 범죄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평화와 화해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달 중순, 재일한인대사관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피해자 명단이 처음으로 발견되면서 90년전 비극의 역사가 다시 뉴스로 떠올랐다. 일본 신주쿠 자택에서 만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강덕상 관장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적극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 역사 바로알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타큐슈 고쿠라교회의 주문홍 목사는 말한다.

“잊혀진 역사는 반복됩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인권을 회복하는 건 역사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자들의 존엄이 높아집니다. 불행한 역사를 함께 아파하고 사죄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솟아납니다.”

Key Word - 관동대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44초.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 지방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이를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3600여개의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이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을 벌여 수천 명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도쿄=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